2008년 08월 14일
고구려어 = 일본어를 퍼뜨리는 일본 공작원
그 잔재로 고구려어를 분리해 브리야트의 퉁구스족 언어나 만주어라고 구라치는 왜인이 급증.
사서에도 말갈어(숙신)는 고구려 언어와 전혀 다르다고 나오는데 뭔놈의 퉁그스가 어쩌고 개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음
기원전 1-3세기 왜인이 생성되기전에 열도는 아이누족의 죠몬 천국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터!
류큐나 훗카이도에 쫓겨 살던 죠몬 토인 아이누족이 고구려인이냐 ?
그럼 왜 일본놈은 아이누어를 안쓰고 일본어를 쓰는것인가?
일본어와 가장 가까운 류큐어는 왜 가장 남쪽에 보존된 것인가?
버마계【보도】어
발 atheng
눈 megan
입 khuga
이 hatai
털 khenai
머리 khara
혀 sila
인도네시아어
눈 mata
손 tangan>손바닥
발 kaki > 뛴다
이 gigi >송곳니
일본어의 기초어휘는 동남아 언어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외면하는가?
일본 극우 국빠세끼들이 이러한 일본어의 고립성을 풀지못하고
최근 고구려어에 끼워맞춰 일본어가 고구려어라고 구라를 치고 다니고 있다.
그 이유는
최근 일본어의 기원이 크레올 학설로 돌아서고 있어 일본어가 말레이시아 계열 언어가 기층이 된다는 사실에
일본 국빠들이 심한 충격을 받고 있다.
(그들은 아이누인을 내세워 백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고 다녔지만 아이누인은 호주 어보리진 계열의 폴리네시안으로 밝혀짐)
그런데 아이누어는 일본어와는 별로 연관성이 없는 고립어이며 민족 조차도 달라 에조라고 멸시되던 토인의 언어다.
그렇다고 일본어와 그나마 가까운 류큐어는 너무 남쪽이기 때문에 일본인들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남은것은 한국어인데 이것 또한 죽을만큼 싫기 때문에 고구려를 따로 분리시켜
일본어 = 퉁그스 일파에 속한다는 학설에 연결시키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에 동의하는 일본 학자는 아무도 없으므로 전부 방구석 니트족 내지는 히끼꼬모리는 이기문이 이야기했던 부분을 발췌해 근거로 삼고있다.
히끼꼬모리의 주장을 심각하게 대응하는 것은 웃긴짓이지만
최근 인조이저팬에도 등장하고 있으며, 몇몇 화교세끼들도 심심치 않게 이 내용을 흘리고 있다 ,
거짓말도 100번 하면 진실이 되는 일본사회에서 일본 국빠놈들의 공작활동이 나날이 거세지므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기문의 허접한 학설(어라하는 부여족 지배층 어휘, 건길지 = 고니키시는 피지배층 언어)을 이용해 그들을 놀려보면
피지배층 언어와 지배층 언어의 분리? 웃기지도 않지만 그대로 일본자료에 적용하면 참담한 결과가 나오지만..
같은 부여족이라면서 왜인들은 어째서 백제왕을 "쿠다라노 고니키시"라고 불렀을까? 호칭을 가지고 말도안되는 민족구분을 하면 왜인은 간단하게 백제의 속민이 되어버린다. 일본서기가 만들어지는 시점까지 사용된 어휘니까.
| 백제의 피지배층 언어는 일본어 | 전통 | 조회 144|공감 0 |
| 번호92058|작성자 |
번호:88139 작성자: navy_blue 작성시간:2008-05-02 23:26:17 ![]() 왕성 부여씨 호어라하 민호 위 건길지 「지배자의 언어로는 임금님을 「 eoraha 」라고해, 피지배족의 언어로는왕을 「konkisi」라고 한것 이라고 해석된다. 이것은 고대에부여(扶餘)와 삼한의 차이를 단적으로 나타낼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리하면, 백제는 부여 사람으로, 고대 한국어로 임금님을 「eorakha」라고 부르는 민족이다. 「어라하」는 지금의 한국어로 대략 해석할수 있다. 그러나 백제의 피지배층 언어 「konikisi」는 해석이 어려운데 속국이었던 왜국의 일본서기에 집중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 왜인들은 백제의 속민으로 백제왕을 「konikisi」라고 불렀다. 그 증거로 백제가 왜국에 하사한 칠지도(七枝刀)에서는 왜왕을 후왕(侯王) 즉 제후라고 부르고 있다.
*코니키시 : 일본인이 백제왕을 부르는 존칭이며 백제 피지배층의 어휘.
그외 왜인들은 백제를 kudara(大國)이라고 부른다. IP xxx.46.xxx.127 |
20080421120870839360890200.jpg (9KB) |
| 신고하기 |
| |||||||
| 뭐 무엇이다.중국의 수의 역사서는, 「일본>>>(쿠다라)백제」라고 기술.(쿠다라)백제도 왕자를 일본에 인질에게 내고 있었던 w | |||||||
| |||||||
| 선조인으로부터, 망상을 뽑으면, 원숭이 이하다 w. | |||||||
| |||||||
| 백제 피지배층의 언어를 보존한 일본어도 나름대로 가치가 있습니다.w | |||||||
| |||||||
| 삼국지 동부지역 무사전에 의하면, 3 세기무렵에 반도 남서부에 거주하고 있던 것은 「마한」이라고 하는 민족이었다.이 마한족은 조선 민족이며, 54의 오구니로부터 구성되어 있었다.그러나, 북방에서 침입해 온 이민족에게 정복되어 버렸다.그 왕조가 (쿠다라)백제이다. | |||||||
| |||||||
| 문법에 취약한 일본인의 해석답다. 정복한 왕조가 백제! | |||||||
| |||||||
| 또「후왕」망상인가.바보자. | |||||||
| |||||||
| 「결실」이라고 쓰여지지 않았는데 「하사」라고 읽을 수 있는 문맹 민족 w망상한다면 혼자로 실시해라.>그 증거로 (쿠다라)백제가 야마토국에 하사 한 칠지도(7지도)에서는 야마토왕을 후왕(후왕) 즉 제후라고 부르고 있다. | |||||||
| |||||||
| 반도에 건넌 많은 일본인도, 이제(벌써) 한국인이 되어 버렸다.한국인은 일본인이 핏줄을 이어받고 있군요 | |||||||
| |||||||
| konkisi >>> kunkisi.>>큰왕>>대왕 | |||||||
| |||||||
| 망상. | |||||||
| |||||||
| (쿠다라)백제에서는 지배층의 언어로는 왕을 「 eoraha 」라고 해, 피지배층의 언어로는 왕을 「konkisi」라고 했다···그렇다고 하는 것은 주서의 기술이다.이것은 (쿠다라)백제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다른 언어 집단으로부터 구성되어 있던 것의 근거의 하나로 여겨지는 것이다.그리고, 삼국지에 있도록(듯이) 반도 남서부의 선주민은 마한족=조선 민족이다.즉, (쿠다라)백제의 피지배층은 마한인(=조선 민족)이며, 지배층은 조선 민족이 아닌 민족이라는 것이 된다. | |||||||
| |||||||
| 대왕 이라는 칭호는 고구려 그리고 그 분족 백제의 고유 호칭 입니다 현대에서 볼때 흔한 명칭 같지만 고대에는 최고 지위자의 고유 명칭 입니다 백제의 대왕이 큐슈에 최초로 후왕을 임명한 증거가 바로 칠지검 입니다 이후 680년까지 큐슈는 백제의 영토 이었습니다 | |||||||
| |||||||
| 근거가 되는 사서를 내라.>(쿠다라)백제의 대왕이 큐슈에 최초로 후왕을 임명한 증거가 바로 나나치검입니다 이후 680년까지 큐슈는 (쿠다라)백제의 영토였습니다 | |||||||
| |||||||
| 일본 서기의 열도에 체류한 수백명??백제 왕족이 체류한 합리적인 이유를 설명하면 반론해 주니다 웃음 | |||||||
| |||||||
| 중국의 정복왕조(겐, 키요시등)를 보면 알도록(듯이) 정복자와 비교해 피지배자의 인구가 훨씬 많다.(쿠다라)백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수가 많은 피지배층의 마한인의 말 「konkisi」가 (쿠다라)백제어로 왕을 나타내는 말로서 일본 서기에 기록되었던 것이다. | |||||||
| |||||||
| …일본의 고전적 해석으로 「(쿠다라)백제왕」을 해석하면 「(쿠다라)백제라고 하는 귀족의 자제」가 되지만?w군주는 아니어 w. | |||||||
| |||||||
| 일본어로 「왕」이라고 하는 것은 「귀족의 칭호」이며, 군주는 아니지만?W 응?W | |||||||
| |||||||
| (쿠다라)백제측(중국어 한문 기술)과, 일본측(일본어로 일본의 의미의 한자 기술)의 기술의 의미를 혼동 해 바보같은 말을 하도록(듯이) 밖에 인식할 수 없지만…w | |||||||
| |||||||
| 큐슈는 백제의 고유 영토>>>생각보다 간단한 사실 | |||||||
| |||||||
| 근거가 되는 사서를 인용하라. | |||||||
| |||||||
| 니혼쇼키 | |||||||
| |||||||
| (와)과의 부분이야?>일본 서기>구체적으로 인용해 주었으면 한다.무리이다고 생각하지만 w | |||||||
| |||||||
| 가쓰라기노 오라든지, 구리쿠마노 오오키미라든지, 미 츠토무왕이라든지, 무가왕이라든지, 일본은에 「왕」은 많이 존재하지만, 군주가 아닙니다.귀족의 칭호입니다.그리고, 그 칭호(성)를 주는 것은 누구지요?W | |||||||
| |||||||
| 이씨 조선의 이왕가가, 일본의 귀족이 되었을 때 「이왕」이라고 자칭하는 것이 용서되어 「국왕모양 nida」라고 기뻐한 조선 토인과 같은 레벨이다 w | |||||||
| |||||||
| 한국인이 (쿠다라)백제를 자랑으로 생각하는 것이 이해할 수 없다.선조를 범해, 노예로 한 이민족의 왕조라고 하는데. | |||||||
| |||||||
| 일본서기를 첫장을 읽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아 열도는 백제의 분국이구나 느낌이 아주 강하게 납니다 ㅋㅋ | |||||||
| |||||||
| 요컨데, 근거는 망상이라고 하는 것이다?w | |||||||
| |||||||
| 확실히 konikisi는 한국어가 아니다. 일본어에 가깝다. 그리고 왜인은 백제의 존함을 직접 부를수 없는 낮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kudara 호칭을 쓴다. | |||||||
| |||||||
| 근거가 없는 망상.>그리고 왜인은 (쿠다라)백제의 존 하는 것을 직접 부를 수 없는 낮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kudara 호칭을 사용한다. | |||||||
| |||||||
| baekje 표음 표기는 티벳의 고대의 기록에도 나타납니다.w 왜인만 大國이라고 불렀다.www | |||||||
| |||||||
| 대국이라고 불렀어?무슨 망상?(쿠다라)백제에=대국이라고 하는 의미 등 일본어에는 없다.티벳의 고대의 기록?구체적인 예는?서적명은?>baekje 표음 표기는 티벳의 고대의 기록에도 나타납니다.w 왜인만 대국이라고 불렀다.www | |||||||
| |||||||
| 나는, 50년남짓 일본인으로서 보내고 있지만, 이런 이야기 (들)물었던 적이 없다 (= ̄ω ̄) y─┛~~ | |||||||
| |||||||
| 아무튼, 어딘가의 금성이든지 화성으로 해 주어 (= ̄ω ̄) y─┛~~ | |||||||
| |||||||
| 망명해 왔다.>torabora47|08-14 20:44 일본 서기의 열도에 체류 한 수백명??(쿠다라)백제 왕족이 체류 한 합리적인 이유를 설명하면 반론하고 즈니다 웃어 | |||||||
| |||||||
| (쿠다라)백제와 한국이 완전히 관계없었던 것을 고백하고 있지 않는가? | |||||||
| |||||||
| (쿠다라)백제와 한국은 사실 전혀 관계가 없는 민족이지만. | |||||||
| |||||||
| 扶餘의 kha와 신라의 khan 호칭은 한국어다.. 그러나 백제의 피지배층 konikisi는 일본서기나 일본어에만 나타나는 왜인 전용 호칭w |
# by | 2008/08/14 23:01 | 반일 모드 | 트랙백 | 덧글(2)
2008년 07월 21일
백제 때 생긴 풍습 [부사칠석제]
![]() |
- 매년 부사칠석제에 주민 200여명 참여 전통과 주민화합의 장 -
대전시중구 부사동은 2006. 9. 27(수) 10:00부터 부사다목적체육관앞광장에서 200여명의 주민이 참가한 가운데 부사칠석제 시연회를 개최했다.
매년 개최되는 이 행사는 동 주민들이 기획하고 직접 참여해 15년째 이어지는 행사로 지역문화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 행사는 부사동 주택가 한복판에서 200여명 주민이 행사일원으로 참가해 전통과 주민화합을 이끌어내는데 목적이 있다.
200여명의 주민들은 오전에 3시간의 연습과정을 거쳐 오후에 시연회를 시작했다.
- 두 여인의 사랑을 때로는 재미있고 우스운 말로써 때로는 흥겨운 농악으로 200여명 한 몸처럼 민속전통놀이로 재현하고, 주민들을 하나로 만들었고 구경나온 온 주민들도 덩실덩실 춤으로 부사동민임을 표현하다.
부사동 각 단체는 너나할 것 없이 모두 나와 행사진행과 먹거리 등 음식을 만들에 구경나온 주민과 노인들에 음식을 나누어주면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부사칠석제 내용은 선바위 치성, 상하부사리상면, 큰기맞절, 부사샘치기, 샘고사, 합궁놀이(오작교 놀이, 혼례식, 합궁), 놀이마당 순으로 이어진다.
- 이 놀이의 핵심은 선바위 치성, 부사 샘치기와 부용, 사득 합궁놀이 중심으로 형성된 놀이로서 ▲ 지명설화에 근원을 둔 마을 고유 향토 신앙에 기인하여 이것이 점차 여름 세시 풍속과 결부되어 놀이의 맥락에 반영 되었다. ▲ 두 마을 사람들이 만나는 오작교를 통해 화해와 상부상조의 뜻을 강조하고 부용, 사득 합궁놀이 등은 여느 지방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며 특히 농악과 어울려 부르는<샘치기 노래>나<부용,사득이의 노래>는 그 독자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대전지방 웃다리 농악의 독특한 가락이 향토성을 북돋는다. ▲ 칠석 세시에 얽힌 농경 관습이 두루 나타나고 인간의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한 "물"을 확보하기 위하여 이 마을 사람들은 줄다리기나 놋다리밟기처럼 농경의 생장의례(生長儀禮)를 긴 세월동안 전승된 놀이에 상징적으로 반영하고 남, 녀, 노, 소 모두가 함께 참여하고 화합하고 단결하는 지혜를 모은 놀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 가 있다
부사칠석제는 오랜 역사속에서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동네의 부흥과 화합을 하는 놀이문화로 발전되어 왔다
- 1938년까지 전통의 맥을 이어오다가 일제시대에 미족문화 말살정책에 의해 중단되었던 것을 8.15 광복 후 다시 계승 하였으나 6. 25 전쟁으로 인하여 잠시 중단되었던 것을 1990년도에 다시 재현하여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 그동안 놀이의 발자취를 살펴보면 1990년 이후 1992년도에는 대전직할시 중구 민속놀이로 선정되었고, 1993년 9월11일 대전직할시 민속예술 경연대회 최우수상과 1994년 10월21일 제 35회전국 민속예술 경연대회에서 최우수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 1994년 10월부터 현재까지 부사칠석놀이 보존회를 구성하여 매년 칠월칠석날과 10월이면 재현하여 계승 보존하고 있으며 후손에게 전승하고 있다.
부사칠석제는 부사동은 대전 보문산의 동편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 이곳에서 전승되는 있는 부사 칠석제의 유래는 백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 구전에 의하여 백제시대 이 마을에는 윗말과 아랫말이 있었는데 두 마을은 고전평에 위치하여 항상 농사에 필요한 물은 몰론 가믐이 잇으면 생활용수까지도 부족하여 다툼이있어 서로 사이가 나빴다고 한다. 위 말에는 부용(芙蓉)이라는 예쁜 처녀 가 살고 있었고, 아랫말에는 사득이라는 총각이 살고 있었다.
- 그들은 모두 늙으신 흘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윗말과 아래말 사이에 있는 샘(수사샘)으로 물을 길러 다니다가 서로 사랑하고 결혼까지 약속하였다.
그러나 신라가 백제를 침략하자 사득이는 백제군으로 전쟁터에 나갔다. 부용이는 사득이가 그리우면 우물가에 가서 샘을 드려다 보면서 사득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살았다. 전쟁이 끝나 같이 갔던 사람들은 돌아왔으나 사득이는 죽고 돌아오지 않았다. 부용이는 상심하여 슬픔에 빠졌고 몸도 야위었으나 날마다 사득이를 그리며 돌아오는 모습을 보기위해 뒷산(보문산)에 있는 선바위에 올라가서 윗마을로 오는 길목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부용이는 그만 실족하여 선바위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몇 해가 지난 어느해 여름 극심한 가뭄이 들어 샘물까지 말라 나오지 않았다. 마을사람들은 물을 길러 먼 곳에 있는 황새샘(현 한밭종합운동장 주경기장)까지 가야만 했는데 이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였다.
그러던 어느 날밤 윗말에 사는 좌상 노인의 꿈에 부용이가 나타나서 자기와 사득이의 연혼 결혼식을 해주면 물을 주겠다고 말했다. 그런가하면 아랫말에 사는 좌상 노인의 꿈에도 사득이가 나타나 부용이가 윗말 노인에게 했던 것처럼 말하였다. 사흘 뒤인 철석날에 윗말, 아랫말 사람들은 부용이 와 사득이가 시키는 대로 샘을 치고, 고사르 지내고 부용이와 사득이를 합궁 시켜주었는데 그러자 이내 말랐던 물이 펑펑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그 뒤 이샘을 윗말사람들은 부용샘, 아랫말 사람들은 사득이샘 이라고 부르다가 마침내는 두이름 첫 자를 따서 부사샘이라고 부르기 시작 하였고, 부사샘이 있는 동네라하여 윗말을 상부사리, 아랫말을 하부사리 라고 부렀다고 하며 오늘날에는 상, 하부사리라는 합쳐 부사동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뒤 매년 칠석날에 부용신을 아주 영험한 신으로 여겨 선바위에서 치성을 드리고 부사샘을 치고 고사를 지내고 부용이와 사득이의 합궁놀이를 한데서 그 유래를 찾는다.
지금까지 마을 사람들은 부용이를 아주 연험한 신으로 여기고, 선바위에 치성을 드리며 무엇이든 이루어진다고 믿어 치성을 드리는 아낙이 많으며 이를 신성시하고 있고 도시발전 속에서도 부사샘터를 아직까지도 정성으로 보존하고 있다.
최근 들어 아들을 낳지 못하는 사람이 선바위에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많이 낳았다고 하여 언제부터인가 아들바위 라고 부른다.
<사진설명> 상·하 마을의 상징하는 용기의 인사장명
<본 보도자료는 연합뉴스의 편집방향과 무관하며 모든 책임은 제공자에 있습니다>
# by | 2008/07/21 22:18 | korea | 트랙백 | 덧글(1)
◀ 이전 페이지다음 페이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