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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정왜기공도권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征倭紀功圖卷」

정왜기공도권은 순천왜성전투,노량해전,남해도 소탕작전 등으로 구성된 두루마리 그림이다.  명나라 황실의 종군화가 그림답게 묘사가 세밀하고 역동적이며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받고 있으나 ,소장자가 사진만 뿌려놓고 잠수해서 많은 자료를 구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11장의 사진 자료는 콜럼비아 대학의 게리레드야드 교수를 통해서 최초로 공개되었다. 이 쓰레드에 붙은 사진들은 인젭에 투고된 그동안 한일 유저들의 사진들을 쭉 모은것이다.

그동안 임진왜란을 그린 전투도 중에는 「평양성전투도」가 전해지고 있었지만 , 전쟁이 끝난 200년후의 작품으로 화가가 전투를 목격하고 그린 것은 아니고, 당시의 기록을 참고해 상상력을 덧붙여 그린 작품이다. 일본측에서 남긴 그림들도 대부분 그러했다.  그러나 최근 입수한 6.5미터의 「정왜기공도권」은 「평양성전투도」와는 전혀 다르고, 병사의 동작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종군 화가가 전지에서 상황을 보면서 그린 일종의 종군화이므로 그 내용이 세밀하다. 「정왜기공도권」을 정확하게 복원시키는 것은 어렵지만, 이 두루마리는 400년전의 사건을 어떤 역사서적보다 자세하게 전하고 있다.

전라남도 순천왜성 전투도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図券 / 壬辰征倭図 )』에 나타난 전투장면을 보면 왜성의 모습을 보다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왜성을 공격하는 장면을 보면 석축위에는 곡륜(曲輪) 가장자리를 따라 이 둘러쳐지고 에 뚫린 총안(銃眼)으로 공성군(攻城軍)을 사격하는 모습이 있고, 넘어에는 목책이 이중으로 세워져 있다. 또한 성내에는 와즙(瓦葺)건물로 보이는 시창(矢倉)이 보이고, 그외에 숙사(宿舍)가 그려져 있으며, 안쪽에는 군데 군데 방패구실을 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판벽(板璧)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해전(海戰)을 그린 것에서는 바닷가에 목책이 세워져 있고 곳곳에 판벽으로 가설하여 이곳에 몸을 은폐하고 공격하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목책과 판벽을 세운 곳이 구(構)의 일부로 추정한다.

순천왜성의 전투 장면 확대 : 상당히 얄밉게 싸우고 있는 유키나가의 철포병들. 
명나라와 조선군이 왜성에 진입하는 장면. 몇몇 사무라이들이 뛰쳐나왔다가 후퇴하고 있다.

순천왜성 천수각의 모습

왜장 유키나가의 탈출 장면. 부장과 함께 배를 타고 성을 빠져나가고 있다.

* 고니시 유키나가 : 유키나가는 명나라의 장군들을 매수해, 무혈 철퇴의 약속을 얻어 냈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 요구를 거부했다. 11월17일에 노량의 해안에서 왜군의 군선500척 중450척을 가라앉혔고 , 이순신이 도망치는 왜군을 쫓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했다. 간신히 도망간 유키나가는 귀국후, 세키가하라의 싸움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적측에 붙었기 때문에,1600년에 처형되었다.
 

해안에서 성을 향해 화살을 날리는 조선군 식별을 위한 태극 깃발이 보인다.



노량해전







조선의 산성을 개조해 쌓은 왜성





 


 

 

모사도중 일부
 

일본 큐슈지방 쿠마모토시에는 蔚山町(울산 마찌)라는 지명이 아직 남아 있다. 400년전 정유재란 당시 울산 서생포 사람들이 붙잡혀 가 마을을 이뤄 살던 곳이다.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 울산을 점령, 2년여 동안 머물던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패퇴하면서 울산의 석공과 축성 기술자들을 쿠마모토성 축성을 위해 이 곳으로 강제이주 시켰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의 3대성에 속하는 구마모토성의 축조 방법도 인근 오사카성(大阪城)과 달리 오히려 울산의 서생포 왜성과 거의 흡사한 것으로 전해졌다. 오사카성 등 당시 당시 일본에서 주로 사용한 축성 방법은 거대한 돌을 하나씩 쌓아 올리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돌을 쌓은 때 돌 틈에 흙을 메워 넣고 성벽도 수직이 아니라 반달 모양과 흡사하게 곡선형으로 만들어 침입자들이 성벽을 기어 오르기 힘들게 만든 구마모토성의 축성법은 오사카성과는 다른 방식이다.
일본내 전국시대의 성 대부분이, 근세 성곽으로서 「싸우는 성」으로부터 「보이는 성」으로  변모해, 혹은 폐성령으로 해체되어 도시 개발의 물결에 감추어져 자취을 감추어 갔지만, 「왜성」은 400년때를 넘겨 축성시의 모습을 그대로 남기고 있다
 

 ◎佐賀新聞(2008/03/24)
 朝鮮半島「倭城」の石垣本格復元

 文禄・慶長の役(壬辰・丁酉倭乱、1592-98年)で日本側が朝鮮半島に築いた倭城の1つ、順天城(韓国・順天市)で行われていた石垣の復元工事がこのほど終了した。過去に例がない本格的な復元で、県立名護屋城博物館(唐津市鎮西町)の学芸課長、高瀬哲郎さん(56)が全面的に指導した。侵略の拠点だった倭城での共同作業を終えた高瀬さんは「日韓が協力し、遺跡を通じて歴史の実態を探るという新たな交流の第一歩になる」と話す。

 順天城は慶長の役の1597年、宇喜多秀家らが築城したとされる。韓国南部沿岸の約30カ所で確認されている倭城のなかでも最大規模で、順天市は観光資源にしようと公園化を計画。事業費は106億ウォン(約11億円)で、昨年1月に工事に取りかかった。

 だが、日本の伝統技術を使い、韓国人の手で行う石垣の復元には困難を伴った。綿密な打ち合わせを経て計画書を作成、名護屋城跡で技術指導も行ったが、昨年2月にメールで送られてきた写真を見た高瀬さんはがく然とした。横向きに並べなければならない石が、不規則に縦や斜めに置かれていた。「当時の築城技術を使って復元するという認識が不足していた」。高瀬さんは積み上げた石をすべて取り壊すよう指示。作業は振り出しに戻った。

 約3カ月間の工事の中断を経て、高瀬さんは5月に現地を訪れた。取り壊しについて作業員は難色を示したが、作業のポイントなどを根気強く説明。石選びや積み上げ作業にも参加し、ともに汗を流した。高瀬さんの訪問をきっかけに復元は軌道に乗り始めた。

 その後は頻繁にメールをやりとりし、作業の状況を確認しながら修正点を指示。大手門から天守台まで、城全体の石垣復元を終えた。高瀬さんは「共通認識を作り上げるまでが難しかったが、文化財としての重要性を理解してくれた後は、日本人よりも素直に耳を傾けてくれた」と振り返る。

 工事の完成が近づいた2月上旬、最終確認のために現地を訪れた高瀬さんに対し、順天市から感謝牌が贈られた。反日感情とも絡む倭城を舞台にした交流の成果に、高瀬さんは「両国の人々が歴史的事実を共有できたことは今後大きな財産になる」と語る。

【写真】復元された順天城の天守台の石垣=韓国・順天市(県立名護屋城博物館提供)

by 카피사루0 | 2008/08/06 00:25 | 조선시대 朝鮮 | 트랙백 | 덧글(3)

2012년 이순신의 해군기지 '삼도수군 통제영'이 돌아온다.

이순신 역사 지구 조성…  세계문화유산 추진 [2008.7.17]

 

3D로 복원한 통제영과 좌수영성 (조선시대 해군 기지)

 

통제영이란? = 통제영은 '삼도수군통제영'의 줄임말로 조선시대의 해군본부라 할 수 있다. 통제영은 선조 26년인 1593년에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직제가 만들어져 경상·전라·충청 3도 수군을 지휘·총괄했던 곳이다.

 

△2012년까지 복원될 통제영 조감도
 
조선시대 경상·전라·충청 3도 수군의 본영이 있었던 통영에 '삼도수군통제영'이 2012년께 복원될 것으로 보인다. 통영시는 5일 통제영지 발굴조사 성과보고회를 열어 고증에 근거한 복원사업으로 세계문화유산을 목표로 본격적으로 추진한다고 밝혔다.
 
조선시대 첫 통제영은 초대 통제사였던 이순신 장군이 만든 한산진영이 최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은 이곳에서 '한산섬 달 밝은 밤에 긴 칼 옆에 차고∼'라는 유명한 시를 지었다.
하지만 통제영지였던 한산진영은 정유재란으로 폐허가 됐고 이후 전란 중 전세에 따라 여러 곳을 전전했다.
 
그러다 통제영이 통영에 다시 들어선 것은 1605년이다. 선조 37년인 1604년 제6대 통제사였던 이경준이 통제영을 현 통영시로 정하고 터를 닦기 시작해 2년 만에 만들었다. 통영은 우리나라 최초 군사계획도시였던 셈이다.
 
그 후 통제영은 1895년 고종 32년에 각 도의 병영 및 수영이 폐영될 때까지 292년 동안 존재했으나 일제강점기때 민족정기 말살정책에 따라 세병관만 남겨지고 크고 작은 관아 100여동이 모두 헐렸다. 통제영 터에는 법원·검찰청·학교·세무서 등이 지어졌다.
 
현재 통영시 문화동·태평동에 걸쳐 있는 통제영지에는 당시 건물로 세병관이 유일하게 남아있고. 그 후 1987년에 복원된 수항루 1동과 두룡포 기사비(경남유형문화재 112호)와 비각이 남아있다.
 
 
 
△통제영 발굴·복원 의미 = 통제영지 발굴·복원 의미는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강제로 없앤 통제영을 고증에 근거해 다시 세우고 한국의 문화유산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따라서 최초의 군사계획도시이자 삼도수군통제영의 도시였던 통영의 정체성을 되찾는 사업으로 풀이된다.
 
삼도수군통제영 발굴과 복원을 위한 작업이 시작된 것은 1996년으로, 통제영지를 사적으로 지정 받기 위해 기본지표조사 등을 벌였고 이를 바탕으로 1998년 사적 제402호로 지정 받았다.
 
본격적인 발굴·복원사업은 1998년으로 당시 정부가 추진한 남해안관광벨트사업 중 유적복원사업에 통제영지 발굴·복원사업이 포함되면서 본격화됐다. 시는 총사업비 596억원(국비 359억·지방비 237억)으로 오는 2009년까지 12공방·백화당·운주당 등 주요 관아 30여동을 복원한다는 계획이다.
 
통제영 고증 복원을 위한 발굴작업은 지난 2005년 12월 시작됐다. 경남문화재연구원은 같은해 12월 사전조사를 벌이고 2006년 2월초부터 실질적인 발굴에 들어가 1년 3개월여만인 오는 12일 마무리할 계획이다.
 
발굴을 담당했던 경남문화재연구원 관계자는 "300여년 전이라는 시간이 짧은 시간이어서 토층 등을 연구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면서 "발굴현장을 바탕으로 통제영이 폐영되기 전 12공방이 활발했던 19세기 당시 만들어졌던 통제영 고지도와 함안총쇄록 등을 조합한다면 고증 복원이 충분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시는 이미 2007년도 공유재산 관리계획 제1차 변경계획을 지난달 시의회에 제출해 통제영 복원사업과 연관한 통제영 거리 조성사업 부지 확보를 위해 146억여원을 들여 토지 99필지, 건물 7동 등을 사들인다는 계획을 승인 받았다.
 
이 사업이 완료되면 이 충무공을 기리는 통영 한산면의 제승당과 함께 명실공히 이순신 장군의 도시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된다.

 

by 카피사루0 | 2008/07/17 00:49 | 조선시대 朝鮮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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