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왕릉 안악 3 (高句麗 王, 安岳3號墳)

4세기 안악3호분 高句麗 壁画 (357年)

북한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
(朝鮮 黃南 安岳郡)



북측 학계에서는 이것을 무덤 주인의 묘지명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것의 바로 아래에 그려져 있는 장하독(帳下督 : 군지휘관)이라는 관직에 대한 설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69세 흉관" 일반적으로는 이것을 "관리를 지내다 죽었다" 로 해석을 하는데, 이것은 한문 어법상 맞지 않는다고 한다. "69세 흉" 만으로 69세에 죽었다는 문장은 끝이 나는데, 이미 완결된 문장의 끝에 어법에 맞지 않게 형용사 "관"이 붙어있는 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관"을 이 밑에 그려져 있는 인물 "장하독"을 꾸미는 말로 본다. 그러면, "69세에 죽은 관리 장하독" 이 돼서 이 묵서명의 동수는 바로 밑에 그려진 장하독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무덤의 주인은 따로 있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바로 고구려의 왕이라는 것이다.

  동수묘를 부인하는 새로운 증거로 두 차례 추가조사의 결과를 들고 있다. 이 조사에서 맞은  편에 있는 인물 위에서도 20여자의 글자가 확인됐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있는 방 앞에 수문장 격으로 서 있는 두 인물위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 글자, 그것은 각기 그 인물들을 설명하는 글일 뿐 무덤 주인공의 묘지명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직도 의도적으로 고구려를 폄훼하려는 목적으로 동수묘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수나라 역사서에선 고구려왕은 백라관을 쓴다고 하였다.

주인공이 쓴 관이 백라관일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이마와 ‘책’ 부분이 금으로 테가 둘러있고 그 위에 흰색의 곱고 섬세하게 짜인 ‘라’로 만든 덧관이 씌어져 있기 때문이다. 관의 끈이 턱밑에서 묶어져서 가슴부분까지 내려와 화려한 장식으로 마무리되고 있는데, 중국은 황제의 경우에도 턱에서 묶어 내린 길이가 매우 짧다. 특히 무관의 경우 늘어뜨리는 길이를 5촌, 즉 약 11.5cm 정도로 규정을 했다. 이런 것이 주인공이 쓴 관을 중국의 무관으로 볼 수 없게 하고 백라관으로 해석하게 한다. 결이 아주 고운 비단종류중의 하나인 “라”를 이용해 만들었다는 독특한 형태의 백라관






 널방 복도에 높이 2m, 길이 6m의 큰 판석에 250여 명의 기사·보졸의 대행렬도

동쪽은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있는 반면, 북쪽은 낡아 흐려져 있는데 이 행렬도는 높이 2미터 길이 10미터에 달하는 벽면을 따라 빼곡하게 그려져 있다. 안악 3호분의 회랑에는 250여명으로 확인된 행렬도가 있다. 전반부의 것만 그런 것이고, 행렬도 전체에 나오는 인원을 모두 고려하면 참가한 인원은 약 500명 정도가 된다. 그런데 중국의 행렬도 경우에도 200명이 채 안 된다고 하니 당시 고구려의 국력이 어느 정도였을 지를 짐작케 한다.

행렬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 수 있게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취악대다. 행렬도의 제일 앞에서 장엄한 행렬의 흥을 돋우려는 듯 앞서가는 취악대에는 크고 작은 북과 뿔피리, 나팔 등 각종 악기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연주자들의 규모가 무려 200여명에 달한다는 것이다 . 삼국사기에 보면, 김유신이 죽었을 때 왕이 내린 고취악대의 기록이 나타나는데 그 인원이 100여명 정도였다고 적고 있는 걸보면 안악 3호분의 규모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김유신은 왕에 버금가는 인물인데 그의 장례 때 동원된 고취악대의 수가 100명 정도였다고 하니, 그런 면에서 이런 200명 이상의 고취악대를 거느리고 행진을 할 수 있는 인물은 고구려의 왕을 두고는 달리 생각할 수 없다는 게 북한 측의 주장이다.


왕의 행차를 알리는 성상(聖上幡) 깃발

왕릉임을 더욱 뒷받침하는 것은 수레를 타고 가는 주인공의 앞에서 한 인물이 들고 가는 깃발에 새겨진 세 글자 “성상번(聖上幡) ”이라고 한다. 성왕이나 성상은 왕을 표시하고 위대한 왕을 나타내는 것인데 집안에 있는 모두루묘지에도 추모성왕, 호태성왕을 나타내는 말이 나온다. 태수라든지 지방장관에 성상은 붙일 수가 없다. 옷도 문제가 있는 것이, 옷고름으로 처리를 하거나 깃과 소매 부분을 화려한 장식단추로 꾸민 복식형태는 고분 벽화가 만들어진 당시 중국의 양진남북조시대와 이전시대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복식형태이다. 허리띠를 묶는 방법에서도 중국의 복식과는 차이가 난다. 이 주인공의 경우는 폭이 좁은 허리띠를 약간 오른편으로 묶어 내린 반면 중국의 복식은 어느 시대, 어느 계층을 막론하고 폭이 아주 넓은 허리띠를 사용했고, 항상 중앙부분에서 묶어 내렸다고 한다. 이 같은 특색들은 같은 시대 중국의 것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고구려 고유의 복식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주인공을 왕으로 보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주인공이 머리에 쓰고 있는 하얀색의 덧관이다. 박선희 교수는 이것이 수서고구려전에 등장하는 고구려왕만이 썼다는 백라관이라는 것이다.

고구려왕 행차도 벽화 3D 재현


인도 지역의 춤이 고구려에 전파된 증거

한국식 부뚜막과 헛간.

  고기 창고 3D복원 모습.










;(*옆의 그림은 장수산성의 지도)그렇다면 이 무덤의 주인공은 한사람밖에 없다. 바로 고국원왕이다. 동수가 고구려로 망명을 온 것도 고국원왕 때이고, 세상을 떠날 때도 고국원왕 재위 중이었다. 즉, 동수는 고국원왕의 재위 기간 중 22년 동안 고구려에 살았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발굴 초창기에도 잠시 제기됐던 고국원왕설이 지금껏 묻혀 있다가 최근에 다시 강력하게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 11월 일본에서는 남북의 고대사 역사학자들이 함께 참여한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북한 사회과학원 소속 석광준 교수는 황해도 신원군 장수산 일대에서 고구려 제2의 수도였던 남평양 유적지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북한이 발표한 남평양 유적지는 안악지방보다 더 후방인 황해남도 신원군 장수산 일대, 약 10.5km에 달하는 험준한 산의 능선을 따라 쌓은 장수산성은 전형적인 고구려식 산성이다. 장수산성의 앞쪽에서는 경주나 부여에 맞먹는 거대한 도시유적과 함께 313년이라는 제작연대가 새겨진 벽돌 왕궁의 건설 때만 사용하는 암치와 막새, 회랑, 행궁터 등 대규모의 도시유적과 유물이 발견됐다고 한다. 이 유적을 북한은 고구려가 남방정책의 기지로 사용하기위해 건설한 남평양이라고 주장한다. 장수산성 근방에 이미 4세기에 남평양이라는 거점을 마련했다는 것은 한반도에서 고구려가 일찍이 세력을 다투고 있었고 백제와 겨루고 있었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고고학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남평양은 고국원왕의 죽음과도 관련이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371년 백제와의 전투에서 고국원왕이 사망한 지역을 평양성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북한학자들은 이 평양이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남평양이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들고 있는 것이 삼국사기 지리지 잡지의 기사인데 이곳에 보면 근초고왕은 고구려의 남평양을 빼앗아 도읍으로 삼았다고 적고 있다. 북한학자들은 이 두 기록이 바로 역사적으로 일찍이 남평양이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것이고, 그 남평양이 최근에 대규모 도시유적이 발굴된 장수산성일대라는 것이다.

상당히 근거가 있다. 고국원왕이 전사한 전투는 남평양에서 이루어졌다. 지리지에 근초고왕이 남평양을 점령했다는 기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도 분명하다. 기본적인 뒷받침도 되고 그래서 꼭 들어맞는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대동강유역의 평양까지 밀려 올라가 거기서 전사한 게 아니고 황해도 남부지방인 장수산성 쪽에서 전사한 것이라 한다.

북한의 주장대로 고구려와 백제의 전투지가 평양이 아니라 남평양이라면, 이것은 그동안 고국원왕설의 최대 약점이었던 부분을 해결해주는 중요한 사실이다. 371년에 고국원왕이 평양에서 죽었다. 그러면 반드시 평양보다 후방인 곳에 무덤이 있어야지, 평양의 앞은 전선인데 그곳에 무덤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남한학자들이 생각하는 논리였다.

장수산성은 평양보다 훨씬 남쪽인 황해도다. 황해도에 장수산성이 바로 남평양이다. 이게 밝혀짐으로 해서 만약 남평양에서 죽었다면 거기보다 약 100리쯤 후방인 안악에 묻힌다는 것이 당위성 있는 얘기다. 때문에 장수산성 유적이 왕릉설을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근거다.

만약 북한의 주장대로 안악 3호분이 고국원왕의 무덤이 맞는다면 그동안 무덤에 대해 가졌던 의문들도 상당부분 풀리게 된다. 불교의 도입연대와 맞지 않았던 연꽃무늬도 해석이 가능하다. 왕이 사망한 371년 이후 무덤이 조성되었을 것임으로 불교의 도입연대와 맞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묵서명 가운데 동수의 출신지를 밝히고 있는 부분을 분석해보면 무덤이 만들어진 시기를 추측할 수 있다. 묵서명에서 동수는 유주군 소속의 요동 평곽 출신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무덤이 조성될 시기를 전후해 요동군은 대부분 평주에 속해 있었고, 유주에 속했던 기간은 370년에서 380년 사이였다. 바로 고국원왕의 사망연대와 일치하는 시기다.

불교가 들어온 뒤 연꽃무늬가 그려질 수 있고, 또 묵서명 중에 요동이 유주에 속했을 때를 보면 고국원왕이다. 고구려 벽화고분 중 최대 규모인 안악 3호분, 이것은 본격적인 남진정책을 시도하면서 평양으로 천도를 하고 백제와의 평양성 전투에서 사망한 고구려의 16대왕 고국원왕의 무덤이라는 것이다. 북한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왕릉설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북한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동수설이 아직까지 우세한 편이다.(*옆의 그림은 전실 천정의 연화. 말각조정의 천정구조를 잘 보여주며, 천정중심부에 끝이 뾰족한 8엽겹꽃의 연꽃무늬가 붉은 선묘로 커다랗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황해도 신원군 일대에 고구려가 일찍부터 제2의 수도를 건설했다는 북한의 이 주장이 맞는다면 이것은 아주 대단한 것이다. 50여년을 끌어오던 숙제인 안악 3호분의 주인공 문제가 풀릴 뿐만 아니라 고구려 역사해석에 있어서도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의 이 주장은 아직까지 객관적 타당성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어떠한 역사 해석이 객관적 타당성을 확보하고 나아가 세계적인 보편성을 가지려면 그 판단 근거가 되는 정보들이 충분히 공개돼야 한다. 뿐만 아니라 현장답사도 함께 이루어져야 가능할 것이다.

by 카피사루0 | 2008/02/14 00:00 | korea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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