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7월 21일
백제 때 생긴 풍습 [부사칠석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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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부사칠석제에 주민 200여명 참여 전통과 주민화합의 장 -
대전시중구 부사동은 2006. 9. 27(수) 10:00부터 부사다목적체육관앞광장에서 200여명의 주민이 참가한 가운데 부사칠석제 시연회를 개최했다.
매년 개최되는 이 행사는 동 주민들이 기획하고 직접 참여해 15년째 이어지는 행사로 지역문화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 행사는 부사동 주택가 한복판에서 200여명 주민이 행사일원으로 참가해 전통과 주민화합을 이끌어내는데 목적이 있다.
200여명의 주민들은 오전에 3시간의 연습과정을 거쳐 오후에 시연회를 시작했다.
- 두 여인의 사랑을 때로는 재미있고 우스운 말로써 때로는 흥겨운 농악으로 200여명 한 몸처럼 민속전통놀이로 재현하고, 주민들을 하나로 만들었고 구경나온 온 주민들도 덩실덩실 춤으로 부사동민임을 표현하다.
부사동 각 단체는 너나할 것 없이 모두 나와 행사진행과 먹거리 등 음식을 만들에 구경나온 주민과 노인들에 음식을 나누어주면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부사칠석제 내용은 선바위 치성, 상하부사리상면, 큰기맞절, 부사샘치기, 샘고사, 합궁놀이(오작교 놀이, 혼례식, 합궁), 놀이마당 순으로 이어진다.
- 이 놀이의 핵심은 선바위 치성, 부사 샘치기와 부용, 사득 합궁놀이 중심으로 형성된 놀이로서 ▲ 지명설화에 근원을 둔 마을 고유 향토 신앙에 기인하여 이것이 점차 여름 세시 풍속과 결부되어 놀이의 맥락에 반영 되었다. ▲ 두 마을 사람들이 만나는 오작교를 통해 화해와 상부상조의 뜻을 강조하고 부용, 사득 합궁놀이 등은 여느 지방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며 특히 농악과 어울려 부르는<샘치기 노래>나<부용,사득이의 노래>는 그 독자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대전지방 웃다리 농악의 독특한 가락이 향토성을 북돋는다. ▲ 칠석 세시에 얽힌 농경 관습이 두루 나타나고 인간의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한 "물"을 확보하기 위하여 이 마을 사람들은 줄다리기나 놋다리밟기처럼 농경의 생장의례(生長儀禮)를 긴 세월동안 전승된 놀이에 상징적으로 반영하고 남, 녀, 노, 소 모두가 함께 참여하고 화합하고 단결하는 지혜를 모은 놀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 가 있다
부사칠석제는 오랜 역사속에서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동네의 부흥과 화합을 하는 놀이문화로 발전되어 왔다
- 1938년까지 전통의 맥을 이어오다가 일제시대에 미족문화 말살정책에 의해 중단되었던 것을 8.15 광복 후 다시 계승 하였으나 6. 25 전쟁으로 인하여 잠시 중단되었던 것을 1990년도에 다시 재현하여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 그동안 놀이의 발자취를 살펴보면 1990년 이후 1992년도에는 대전직할시 중구 민속놀이로 선정되었고, 1993년 9월11일 대전직할시 민속예술 경연대회 최우수상과 1994년 10월21일 제 35회전국 민속예술 경연대회에서 최우수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 1994년 10월부터 현재까지 부사칠석놀이 보존회를 구성하여 매년 칠월칠석날과 10월이면 재현하여 계승 보존하고 있으며 후손에게 전승하고 있다.
부사칠석제는 부사동은 대전 보문산의 동편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 이곳에서 전승되는 있는 부사 칠석제의 유래는 백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 구전에 의하여 백제시대 이 마을에는 윗말과 아랫말이 있었는데 두 마을은 고전평에 위치하여 항상 농사에 필요한 물은 몰론 가믐이 잇으면 생활용수까지도 부족하여 다툼이있어 서로 사이가 나빴다고 한다. 위 말에는 부용(芙蓉)이라는 예쁜 처녀 가 살고 있었고, 아랫말에는 사득이라는 총각이 살고 있었다.
- 그들은 모두 늙으신 흘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윗말과 아래말 사이에 있는 샘(수사샘)으로 물을 길러 다니다가 서로 사랑하고 결혼까지 약속하였다.
그러나 신라가 백제를 침략하자 사득이는 백제군으로 전쟁터에 나갔다. 부용이는 사득이가 그리우면 우물가에 가서 샘을 드려다 보면서 사득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살았다. 전쟁이 끝나 같이 갔던 사람들은 돌아왔으나 사득이는 죽고 돌아오지 않았다. 부용이는 상심하여 슬픔에 빠졌고 몸도 야위었으나 날마다 사득이를 그리며 돌아오는 모습을 보기위해 뒷산(보문산)에 있는 선바위에 올라가서 윗마을로 오는 길목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부용이는 그만 실족하여 선바위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몇 해가 지난 어느해 여름 극심한 가뭄이 들어 샘물까지 말라 나오지 않았다. 마을사람들은 물을 길러 먼 곳에 있는 황새샘(현 한밭종합운동장 주경기장)까지 가야만 했는데 이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였다.
그러던 어느 날밤 윗말에 사는 좌상 노인의 꿈에 부용이가 나타나서 자기와 사득이의 연혼 결혼식을 해주면 물을 주겠다고 말했다. 그런가하면 아랫말에 사는 좌상 노인의 꿈에도 사득이가 나타나 부용이가 윗말 노인에게 했던 것처럼 말하였다. 사흘 뒤인 철석날에 윗말, 아랫말 사람들은 부용이 와 사득이가 시키는 대로 샘을 치고, 고사르 지내고 부용이와 사득이를 합궁 시켜주었는데 그러자 이내 말랐던 물이 펑펑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그 뒤 이샘을 윗말사람들은 부용샘, 아랫말 사람들은 사득이샘 이라고 부르다가 마침내는 두이름 첫 자를 따서 부사샘이라고 부르기 시작 하였고, 부사샘이 있는 동네라하여 윗말을 상부사리, 아랫말을 하부사리 라고 부렀다고 하며 오늘날에는 상, 하부사리라는 합쳐 부사동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뒤 매년 칠석날에 부용신을 아주 영험한 신으로 여겨 선바위에서 치성을 드리고 부사샘을 치고 고사를 지내고 부용이와 사득이의 합궁놀이를 한데서 그 유래를 찾는다.
지금까지 마을 사람들은 부용이를 아주 연험한 신으로 여기고, 선바위에 치성을 드리며 무엇이든 이루어진다고 믿어 치성을 드리는 아낙이 많으며 이를 신성시하고 있고 도시발전 속에서도 부사샘터를 아직까지도 정성으로 보존하고 있다.
최근 들어 아들을 낳지 못하는 사람이 선바위에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많이 낳았다고 하여 언제부터인가 아들바위 라고 부른다.
<사진설명> 상·하 마을의 상징하는 용기의 인사장명
<본 보도자료는 연합뉴스의 편집방향과 무관하며 모든 책임은 제공자에 있습니다>
# by | 2008/07/21 22:18 | korea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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