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스. 고구려 수나라 전쟁

역사스페셜10 철저 분석, 고구려 수나라 전쟁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기 때에 백만 대군으로 남쪽으로는 오, 월을 침범하고 북쪽으로는 유, 연, 제, 노나라를 뒤흔들어서 오랫동안 중국을 핍박했다. 수나라가 멸망한 것도 바로 그런 고구려의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 삼국사기
400년 간 계속되던 분열과 혼란시대의 막을 내리고 중국 땅에 들어선 통일왕조 수나라. 수나라는 고구려와 16년에 걸쳐 4번의 전쟁을 치렀다. 
 
1. 죽어서도 하늘의 벌을 받았다는 왕 수양제

후대 사람들은 중국 수나라의 두번째 왕이자 마지막 왕인 양광을 수양제라는 시호로 불렀다. ‘양제’라는 말에는 하늘을 거역하고 백성을 학대했다는 뜻이 담겨있다. 이 수양제가 세 차례에 걸쳐 고구려와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현재 남아있는 수양제의 무덤은 황제의 무덤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초라하다.


2. 고구려 - 또 다른 천하의 중심

수나라는 통일 후 주변의 이민족들을 차례로 정복해 나간다. 중국이 천하의 중심을 이루어야 한다며 다른 민족들을 자신 앞에 고개를 숙이게 한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동쪽에 있는 또 다른 천하의 중심, 고구려가 있는 한 중국의 천하는 서방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3. 경제강국 고구려

북방의 이민족, 중국, 한반도, 일본 그리고 중앙아시아 상인들까지 대거 모여들었던 중국 요서지방의 조양(영주)시는 6세기 말 고구려의 세력권이었다. 당시 고구려는 이 노른자 땅을 바탕으로 하여 중개 무역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해상무역도 활발했다. 이 모든 것은 군사 대국 고구려의 숨겨진 면모 즉, 경제대국 고구려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4. 수양제의 고구려 정벌

문명대전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던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은 두 나라의 자존심을 건 양보할 수 없는 전쟁으로 굳혀져 간다. 수양제는 고구려정벌을 앞두고 만리장성을 보수하는 대공사를 벌인다. 이 공사에 동원된 장정만도 백만 명에 이르렀다. 또한, 대대적인 신무기 개발을 명령하고, 거대한 군함을 건조하는 등 만반의 전쟁준비를 마친 수양제는 고구려 정벌에 나선다.


5. 고구려의 선제 공격

고구려는 자신만만했다. 수나라의 영주지방을 선제공격하면서 수나라의 전력을 슬쩍 떠보기도 한다. 고구려 자신감의 원동력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 해답은 전운이 감도는 고구려의 땅 중국 요령성에 위치한 백암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6. 두 천하의 자존심 살수대첩

고구려와 수나라는 16년 동안 모두 네 번의 전쟁을 치뤘지만 현재 기록으로 남아 있는 전쟁은 살수대첩뿐이다. 두 천하가 맞붙었던 일전. 중국역사는 살수에서의 수나라 참패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요동을 건너간 군사는 모두 30만 5천명. 그러나 돌아온 군사는 오직 2천 7백 명뿐이었다.’


7. 16년 전쟁의 끝- 수나라의 운명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무참히 패한 후, 수나라에서는 전쟁을 반대하는 가요가 유행했다고 한다. ‘관군이 창검으로 고구려를 친다하네, 허나 요동에 가면 오직 죽음뿐 온몸이 찔리고 머리가 잘릴 것을…’ 그리고 수나라 이후 중국 통일왕조로 들어선 당나라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국서 한 장을 고구려에 보낸다. ‘각자의 영토를 잘 보전하며 서로 화복하게 지내니 다행한 일입니다….’

 

8. 고-수전쟁

고구려와 수나라는 16년간 4번 전쟁을 함
1.3차는 제대로 전쟁도 하지 못하고 물러감
중국기록으로는 자연재해때문이라고 했다
 
본격적인 전쟁은 2차전쟁
서기 612년 4월 수나라의 100만 대군은 요하를 건너 고구려의 요동성으로 진격함
요동성은 평지에 세워진 성이었다 높이는 30m 수나라 군대는 단 한번도 이 성을 넘지 못했다
 
요동성은 수나라 군대를 3개월간 붙잡고 있었음
요동성함락에 실패한 수양제는 별동대 30만을 조직해 고구려 수도 평양성을 해군과 함께 합동작전으로 공격함
 
그러나 고구려 군은 비사성을 중심으로 식량 보급로를 차단한다

신기한 전략은 하늘에  이치를 깨달았고 기묘한 계책은 땅에 이치를 통달했네
이미 싸움에 이겨 공이 높았으니 싸움에 만족하고 그만함이 어떠한가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의 유인책 -

지금의 청천강인 살수

살수를 건너 평양으로 건너간 수나라군대는 식량보급이 끊긴상태에서 오래버티지 못하고 다시 후퇴하기 시작
때맞춰 고구려군은 둑을 무너뜨려 허리를 끊고 고립된 수나라 군대에 선두와 후미에 총공격을 가함
패주하는 수나라 군대를 쫒아 압록강까지 쫒아감
 
고구려 대승 ,살아간 수나라 군대는 거의 없음

북경대 도서관
 
살수전쟁에 대목에 대하여

"요동을 건너간 병사는 모두 30만 5천명, 그러나 돌아간 병사는 2천 7백명 뿐이었다"

수나라에서는 반전가요가 유행-
"긴창은 하늘을 덮고 칼과 전차는 햇빛에 반짝이네
산위에서는 사슴과 노루를 잡지만 산 아래에서는 소와 양을 잡는다네
문득 듣자하니 관군이 왔다는데 창검으로 고구려를 친다하네
허나 요동에 가면 오직 죽음뿐 온 몸이 찔리고 머리가 짤린다네"
 
 
패자가 된 수나라의 운명은
수양제의 궁궐은 지금 모두 차밭으로 바뀌고 수양제의 무덤은 돌보는 이 하나 없이 처참하다
고구려에 패한 후 수나라는 극도의 혼란에 휩싸임
그럼에도 수양제는 100여명의 미인과 호위호식했다고 함

전쟁이 끝난 후 5년후 ,당은 고구려에 한장의 국서를 보낸다

이로써 고구려는 동북아의 명실상부한 폐자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16년간 전쟁에서 승리한 고구려는 독자적인 천하관과 문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군사강국이었고 경제강국이었다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 隋皇失馭 由於征遼 (삼국사기권46,열전 제6 최치원전).
고려와 백제는 전성기 때에 백만 대군으로 남쪽으로는 오, 월을 침범하고 북쪽으로는 유, 연, 제, 노나라를 뒤흔들어서 오랫동안 중국을 핍박했다. 수나라가 멸망한 것도 바로 그런 고구려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중국 수나라의 두번쨰 왕이자 마지막 왕인 양광입니다. 이 양광을 후대 사람들은 수양제라는 시호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양제란 시호에는 하늘을 거역하고 백성을 학대했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수양제, 그는 왜 후대사람들로부터 이렇게 혹독한 평가를 받았을까요? 수양제는 우리역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입 니다. 그가 바로 세차례에 걸쳐 고구려와 전쟁을 일으켰던 장본인인 것입니다. 수양제가 일으킨 고구려 수나라 전쟁은 장장 16 년에 걸쳐서 이루어진 장기전이었고, 그 규모는 가히 세계대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거대했습니다.우리역사는 물론 중국역사에서도 그때 까지 이런 전쟁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수양제는 왜 전쟁을 일으켰을까요? 그리고 전쟁을 위해 어떤 준비를 했고, 또 그 결과는 무엇이었을까요? 중국 양자강 하류에 있는 양주시 양주는 수양제가 살아 생전 가장 아끼고 사랑 했던 곳이었다. 13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이곳 양주에 수양제의 자취는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양주에서 한참 떨어진 외딴마을에 수양제의 무덤이 있었다. 황제의 무덤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초라한 봉분이었지만, 그 앞에 세워진 비석은 무덤의 주인이 분명 수양제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동안 돌보는 손길 하나 없었는지 봉분의 흙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무덤 한쪽에는 사람들이 오르내린 길이 나 있었고, 누군가 무덤 꼭대기에 나무로 쐐기를 박아놓은 것도 발견할 수 있었다. 수양제의 무덤은 그동안 세 번이나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그만큼 수난을 겪어 왔던 것이다. 이곳에는 민간전설이 있는데 하늘의 신이 양제의 무덤에 벼락을 내렸다고 한다. 무덤은 세부분으로 쪼개졌는데 사람들은 수양제가 죽어서도 하늘의 벌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신기하게도 전설의 내용처럼 수양제의 무덤옆에는 움푹 패인 자리가 남아 있었다. 그는 도대체 무슨 일을 했기에 이렇듯 철저히 버림 받은 것일까? 그 실마리는 오히려 수양제가 후손들에게 남긴 커다란 유산에서 찾을 수 있었다. 1300년이 지난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수양제의 유산, 그것은 양자강과 황하는 잇는 대운하였다. 중국의 3대 기적중의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대운하는 수양제 필생의 대사업이었다. 수양제는 이 운하는 만들기 위해 30년동안 500만명 이상의 인원을 동원하는 집념을 보였다. 그래서 완성된 것이 양자강과 낙구를 잇는 통제거와 낙구와 북경을 잇는 영제거다. 완성된 운하의 길이는 1300킬로미터에 이른다. 운하의 끝이 닿는 곳은 지금의 북경이다. 당시 수양제는 휘황 찬란한 황제의 배를 타고 양자강 하류와 북경을 오갔다고 한다. 중국의 남북을 잇는 대운하,수양제는 무슨 목적으로 이토록 거대한 물길을 낸 것일까? 운하의 시작은 양제의 아버지인 문제로부터 시작된 것지만 양제 때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운하는 남과 북의 물자와 인원을 이동시키기 위한 것인데 그것은 중국의 통일전쟁과 고구려의 정벌을 위한 것이다.

 

 

운하의 끝인 북경 남부에는 탁군이란 지역이 있었다.이곳이 바로 고구려 정벌의 출발지다. 612년 1월, 수양제가 고구려 정벌에 나설때도 전국각지에서 소집한 군사들이 운하를 타고 이곳 탁군으로 집결했다. 당시 원정군 규모는 대장 우문술이 지휘하는 좌군 52만 8천명. 대장 우중문이 지휘하는 우군 52만 8쳔명 수양제가 직접 이끄는 중군 26만 4천명 이렇게 탁군에 집결한 수나라 군사는 모두 132만명!! 이들은 다시 두갈래로 나뉘어,육군백만은 요하쪽으로 수군 10만은 동래지역으로 향했다. 수나라의 군사들이 모두 출발하는데에는 총 40일이 걸렸고,그 길이도 서울과 부산 거리인 432 킬로미터에 이르렀다. 세계 역사상 유례 없는 최대의 원정이었다. 수양제는 수백만명을 동원해서 거대한 운하를 건 설하고 전국을 전시체제로 만들면서까지 고구려를 정벌하려 했습니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588년 수나라는 중국을 통일합니다. 400년간 계속되던 분열과 혼란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드디어 중국 땅에 통일왕조가 들어선 것입니다. 중국을 통일한 후에 수나라는 주변의 이민족들을 차례로 정복해서 고개를 숙이게 합니다. 이는 중국이 천하의 중심을 이루어야 한다는 중화사상이 팽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수나라의 동쪽엔 고구려가 있었습니다.고구려는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지도 않았고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이렇게 도도한 고구려를 혼내주기 위해서 수나라는 전쟁을 일으켰던 것일까요? 그렇다고 하기엔 선뜻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수나 라가 중국통일에 동원한 병력은 50만이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서는 그 두배가 넘는 무려 백이십만의 병력을 동원합니다. 한마디로 이 전쟁을 위해서 수나라는 모든 역량을 총동원했던 것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이 엄청난 전쟁의 진정한 원인은 무엇인지 찾아 보겠습니다.

 

 

 

 

지난 86년 경남 합천군 성산리에서는 놀라운 발견이 있었다. 수물 일곱개의 거대한 봉분과 천여기가 넘는 소형고분이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4세기에서 6세기에 걸친 가야지역 수장들의 공동무덤이었다. 그런데 무덤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아주  특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5세기의 고분에서부터 이전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유물들이 출토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철로 만든 갑주류였다. 군사들이 썼을 것으로 보이는 견고한 철제투구, 말머리에 씌운 철제 말 투구, 그리고 말에게 입힌 갑옷 조각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이런 유물들이 느닷없이 나타난 것이다.

 

좀 더 남쪽에 있는 부산 복천동 11호분은 5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는 가야 수장의 고분이다. 그런데 이 고분에서도 옥전고분에서 출토된 갑주류와 똑같은 모양의 유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복천동 고분에서는 철제투구외에도 철제 목 가리개와 말 투구 ,그리고 말 엉덩이에 달았던 철제 깃발 꽂이까지 출토되었다. 이 유물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 해답을 발견한 곳은 바로 고구려의 벽화였다. 벽화속에 그려진 고구려 군사의 투구와 목가리개는 두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과 정확이 일치했다. 역시 고구려 군사가 타고 있는 말 투구, 꼬리장식도 유물의 모양과 똑 같았다. 이 유물들은 틀림없이 고구려의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고구려 벽화속의 화살통 장식을 그대로 떼어낸 것처럼 가야의 고분에서 똑같은 무늬의 유물이 나온 것이다 이렇게 고구려의 갑주가 한반도 남부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주목되는 것은 광개토왕 비문에 나온 AD 400년 경자년 고구려의 낙동강유역의 남정에 하나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고구려는 5세기 무렵 한반도 남부 깊숙한 곳까지 세력을 뻗고 있었다.그렇다면 당시 신라와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충북 중원군 입석리 당시 신라의 땅이었던 이곳에 고구려인들은 비석을 하나 세웠다. 이 중원고구려비의 희미한 비문속에 두나라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열쇠가 있다. 신라토내 당주, 이것은 신라에 주둔해 있는 고구려군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이렇게 군대를 주둔시켰다는 사실은 당시 고구려가 신라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고구려의 진출은 한반도 납부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평남 덕흥리에서 발견된 한 고분 벽화는 무척 흥미로운 사실을 전해준다. 이 무덤의 주인은 고구려의 진이란 사람이다. 그가 유주지역의 자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열세명의 부하태수들로부터 업무보고를 받는데 그 태수들의 지역이 벽화속에 정확히 기록 되어 있다. 과연 이 열 세 지역은 지금의 어디일까? 단국대 윤내현 교수의 고증을 통해 열세지역의 위치를 확인 할 수 있었다.결과는 놀라웠다. 벽화에 기록된 열 세지역은 모두 지금의 북경 부근에 위치해 있었다. 이것은 5세기초 고구려가 중국의 북경지역을 장악할 정도로 강성했다는 증거였다. 고구려의 영토가 중국의 화북지역 중심부까지 깊숙히 진출했던 것 같습니다. 이때 고구려가 이렇게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중국이 대단히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5호 16국시대라고 그러는데 북방 이민족들이 남하해가지고 왕조를 세웠다가 망하고 단명한 왕조들이 자주 바뀌는 그런 시기였거든요. 아주 혼란한 시기였습니다.이런 시기에 충분히 고구려가 중국에 진출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이 듭니다. 지금 제 앞에 우뚝 서 있는 이 비석은 거의 7미터 높이로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 광개토대왕비입니다. 이 비석을 통해서 우리는 고구려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광개토대왕을 어떻게 불렀을까요?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 왕중의 왕인 태왕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또 이 비석에는 주변의 모든 나라와 민족을 정복 한 광개토왕의 업적이 화려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런 광개토왕을 고구려 사람들은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태왕 은택 황천 위무 사해 - 태왕의 업적은 황천에 달하고 위력은 사해에 떨쳤다. 이것은 함경남도의 한 절터에서 발견된 고구려시대의 금동판입니다. 이 금동판에는 당시 고구려 사람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 적혀 있습니다. "천손 ,하늘의 자손" 지금 보신 이 두 가지 유물에 나타난 기록, 태왕, 사해, 천손 과같은 말들은 바로 고구려가 천하를 지배하는 중심국가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고구려는 중국의 동쪽에 있는 또 다른 천하의 중심이었고, 이런 고구려가 존재하는 한 중국의 천하는 서방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것입니다. 이것이 수나라가 전쟁을 일으킨 한가지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고구려 수나라 전쟁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중국 요서지방의 조양시는 인구80만의 자그마한 도시다. 하지만 1300년전 이곳은 동북 아시아에서 가장 큰 국제시장이 들어선 무역의 중심지였다. 이 지역의 중요성은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거대한 탑이 말해주고 있다. 당나라는 당시 이 지역을 차지했다는 표시로 80미터 높이의 거대한 탑을 세웠다. 요나라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지역을 차지한 거란족은 82미터 높이의 탑을 세웠다. 요나라의 영토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이런 기념비를 세운것이다 북방의 이민족,중국,한반도,일본,그리고 중앙아시아상인들까지 대거 모여들었던 이 노른자 땅이, 6세기 말경에는 바로 고구려의 세력권이었다. 중국의 역사서 신당서는 유성 고려시역 6 조양의 옛 지명인 유성에 고려시장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이곳 유성에서 고구려는 북방민족에게 농산물이나 철을 수출하고 말과 가죽류를 수입했다. 중국과는 말,황금 ,화살등을 수출하고 비단 장신구등을 수입 했다.중개 무역권도 고구려가 가지고 있었다. 당시 고구려의 무역은 동북아시아를 넘어 중앙아시아까지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유물이 몽고고원에서 발견 되었다. 돌궐이 세운 이 비석에는 552년 고구려에서 사신이 다녀갔다는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또 고구려의 사신들은 널리 중앙아시아까지 왕래 하고 있었다.외교는 무역과 불가분의 관계였다. 고구려의 무역은 해상을 통해서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서기 438년 고구려는 800필의 말을 남송으로 수출한다.당시 고구려는 황해의 해상권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는 군사적으로 매우 강국이었었는데 그것을 뒷받침하느것은 경제력이었습니다. 고구려의 경제력은 자체에서 생산하는 생산물도 있겠지만 북방과 남방에 있는 물건들을 서로 교역하는 중개무역을 담당했었기 때문에 거기서 발생하는 박대한 이익을 바탕으로 경제적인 강국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거대한 시장권과 교역권,이것이 바로 고구려 수나라전쟁의 또다른 이유였던 것이다. 이로써 수나라가 국운을 걸고 전쟁을 일으켰던 두 번째 이유가 밝혀졌습니다.그런데 과연 전쟁의 원인은 이것 뿐이었을까요?  혹시 우리가 모르고 있는 또 다른 원인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요? 고구려 수나라 전쟁은 문명대전이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두나라는 자존심을 걸고 한치의 양보도 할 수 없었겠죠.

 

 

 

 

 

 

지금 보시는 이것은 수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개발한 신무기중의 하나인 운제입니다. 수레에 타고 있던 군사들이 이 밧줄을 잡아당기면 약 40미터 가량의 사다리가 펼쳐집니다. 고구려의 높은 성벽을 넘기위해 수나라는 이런 무기를 개발했던 것입니다.수나라의 전쟁준비는 이렇듯 치밀했습니다. 북방의 이민족을 막기 위해 쌓았던 중국의 만리장성은 수나라가 들어서기까지 오랫동안 버려진 채 훼손되어 가고 있었다. 고구려 정벌을 앞두고 수양제는 이 만리장성을 보수하는 대공사를 벌인다..이 곳사에 동원된 장정만도 백만명에 이르렀다.
수양제로서는 고구려 정벌에 앞서 변방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607년 수양제는 대대적인 신무기 개발을 명령한다. 소차는 엘리베이터처럼 움직이면서 성안의 동태를 살피는 정찰용 차량이다. 전호피차는 성벽 가까이에 접근해서 땅을 팔수 있도록 만든 장갑무기이다. 이렇게 터널을 만들어서 성안으로 몰래 진입하려 한 것이다. 포행차라는 이름의 무기도 있었다. 이것은 발석차라고도 하는데 수백가닥의 줄을 한꺼번에 잡아당겨서 거대한 돌을 날려보내는 무기다. 운제가 만들어진것도 이때였다. 높은 성벽을 오르기위해 40미터의 사다리를 펼칠 수 있도록 고안한 무기다. 당차라는 강력한 무기도 개발됐다. 당차는 거대한 쇠망치를 앞뒤로 흔들어 성벽이나 성문을 파괴한다.또 수십명의 군사가 함께 싸울 수 있는 팔륜누차도 개발했다.

 

 

중국 산동반도의 등주성은 당시 중국의 주요 무역항이자 수군기지가 있는 곳이었다. 고구려 정벌을 위해 10만 수군이 출발한 곳도 바로 이곳 등주성 지역이다. 출정에 앞서 등주성 일대에서도 대대적인 전쟁준비가 이루어졌다. 고구려 침공을 위해서는 해군의 공격이 필수적이어서 수양제는 엄청난 수의 전선을 만들고자 했다. 그는 전국의 조선 기술자를 이곳 산동으로 집결시켜서 맨처음 500척 이상의 큰 선박을 건조하였다. 당시 수나라 군사들은 어떤 배를 타고 갔을까? 그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다행히 당시 만들어진 전선중에서 한척의 도면을 구할 수 있었다. 도면을 토대로 영상 복원한 수나라의 오층 누선이다.최고 천명의 군사를 태울 수 있는 그야말로 거대한 군함이었다. 이렇게 만반의 전쟁준비를 마치고 수나라 군사들은 의기양양하게 고구려 정벌에 나선 것이다. 수나라가 이렇게 전쟁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고구려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여기,그 의문을 풀 수 있는 한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598년, 고구려는 수나라의 영주지방을 선제 공격합니다 .당시 고구려의 평원왕은 기병 1만을 이끌고 직접 공격에 나섰습니다. 이 공격이 수나라가 본격적인 전쟁을 일으키기 이전에 이루어졌고,전쟁의 실질적인 출발점이었다는데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고구려는 수나라와의 전쟁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수나라의 전력을 슬쩍 떠봤던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고구려의 자신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수나라와의 일전을 앞두고 고구려가 자신만만했던 그 배경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전운이 감도는 고구려의 땅,중국 요령성 등탑현에는 그 역사의 현장이 있다. 고구려의 백암성. 14 천3백년 동안 아무도 돌보지 않았건만 지금도 백암성은 장엄한 옛 모습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고구려의 가장 큰 무기는 바로 성이었다. 수나라가 가공할만한 무기를 만든것도 모두 고구려의 성을 넘기 위해서였다. 도대체 고구려의 성은 어떤 위력울 가진것일까? 현재 남아 있는 백암성 성벽은 높이가 10미터,원래의 높이는 15미터였을것으로 추정된다. 구릉지역의 능선을 따라 성벽을 구축한 백암성은 가장 높은 곳에 총 지휘소인 장대를 설치했다. 성내부는 반구릉지대로 한쪽면은 태자하를 끼고 있고 그 안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백암성의 다른 한쪽은 200미터 높이의 까까지른 절벽이었다.고구려의 성은 이렇게 최대한 자연지형을 이용했던 것이다. 고구려의 성은 축성법도 독특했다.성벽아래는 마치 계단처럼 차곡차곡 안으로 돌을 들여 쌓고 있었다. 성벽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 튼튼한 기초를 만드는 것이다. 성벽을 넘어오는 적군을 공격하기 위해 고구려 성은 독특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 대표적인 시설이 바로 치.  백암성은 60미터 간격으로 거대한 치가 설치돼 있는데, 치의 간격은 화살이 미치는 사정거리를 정확히 계산한 것이다. 적군이 성벽을 오르면 고구려 군은 곧바로 공격에 나선다. 치가 설치된 성에서는 이렇게 세방향에서의 공격이 가능하다. 현재 백암성의 성문은 무너지고 없는 상태지만 성문 진입이 어렵다는 점도 고구려성의 특징이다. 성문은 반원형 성벽으로 감싸여 있고, 그안에 들어온 적군은 꼼짝없이 갇힌채 화살공격을 받게 된다. 이렇게 견고한 성들이 줄지어서 고구려의 제 1차 방어선을 이루고 있었다. 이중 비사성에서 용담산성에 이르는 성벽이 바로 천리 장성이다. 이번에는 고구려 해양방어의 요새였던 비사성을 찾아 보았다.비사성의 현재 위치는 중국 요령성 금현에 우뚝 솟은 대흑산이었다. 산정상을 휘두른 길다란 성벽,이것이 바로 고구려의 비사성이었다. 지금은 대흑산산성이란 중국이름으로 바뀌었지만 청일전쟁때까지만 해도 중국의 해군기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험준한 산세를 이용한 비사성은 천년의 세월뒤에도 여전히 천혜의 요새 역할을 한 것이다. 최근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았다고 한다.요동제일의 전망을 자랑하는 비사성. 1300년전,고구려는 바로 이곳에서 산너머로 저 멀리 바다로 진격해 오는 수나라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와 수나라는 16년 동안 모두 네 번의 전쟁을 치뤘습니다. 그런데 1차 전쟁과 3,4차 전쟁에서 수나라는 제대로 된 공격 한번 해 보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중국의 역사서는 그 이유를 자연 재해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고구려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실을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기록에서 고구려와 수나라가 일대 접전을 벌인것은 제2차 전쟁뿐입니다. 우리는 이 전쟁을 살수대첩으로 기억하고 있습니 다.하지만 살수대첩은 이 전쟁의 일부분이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고구려 대 수나라, 두 천하의 중심 이 맞붙었던 일전이 과연 어떻게 전개 됐는지, 제2차 전쟁을 살펴보겠습니다. 612년 4월,수나라의 백만대군은 요하를 건너 고구려의 요동성으로 진격했다 중국 요령성의 요양시는 고구려의 관문이자 요동지역 최고의 요새였던 요동성이 있었던 곳이다. 수나라 백만대군을 상대로 싸웠던 요동성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요동성의 흔적은 이곳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그나마 요동성에 대한 간략한 기록이 남아 있어 옛 모습을 복원해 볼 수 있었다.

 

 

요동성은 태자하를 해자로 삼은 평지성이었다. 요동성 측면 11 성벽의 높이는 20미터.수나라 군사는 단 한번도 이 성벽을 넘지 못했다 당시 요동성은 성안에 50만석의 군량미를 비축해 놓고 수나라 백만대군의 발목을 3개월째 잡고 있었다. 요동성 함락에 실패한 수양제는 별동대 30만을 조직해서 고구려 수도인 평양성을 공략한다. 바다로 진격하는 수군과 합동작전을 펴게 한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 수군은 비사성을 중심으로 수나라군의 보급로를 차단한다. 수나라의 별동대는 식량보급이 없는 상태에서 진격을 하게 된 것이다. 신기한 전략은 하늘의 이치를 깨달았고 기묘한 계책은 땅의 이치를 통달했네 이미 싸움에 이겨 공이 높았으니 만족함을 알고 그만함이 어떠한가! 당시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은 수나라의 별동대를 물리치기 위해 유인작전을 펼쳤다. 고구려의 유인작전인 성공을 거둔 곳은 지금의 청천강인 바로 살수에서였다. 고구려군은 미리 살수의 강상류에 둑을 쌓고 수나라군이 건너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7월 초순 유인작전에 말려든 수나라군은 살수를 건너 평양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식량보급이 끊긴 상태에서 수나라군은 오래버티지 못하고 다시 후퇴하기 시작했다 때맞춰 고구려군은 미리 쌓아둔 둑을 무너뜨리고 수나라군의 허리를 끊었다. 그리고 고립된 수나라군의 선두와 후미에 총공격을 가했던 것이다.
패주하는 수나라 군사를 쫓아 고구려군은 압록강까지 추격해 들어갔다.이 공격에서 살아 남은 수나라 군사는 거의 없었다. 고구려의 대승이었다. 역사속에서 이 전쟁은 과연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 실패의 역사를 좀처럼 보여 드러 않는 중국의 기록속에서 드디어 살수전쟁의 대목을 발견할 수 있었다. 중국은 당시 수나라의 참패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요동을 건너간 군사는 모두 30만 오천명.그러나 돌아온 군사는 오직 2천 7백명뿐이었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무참히 패배한 후,수나라에서는 전쟁을 반대하는 이런 반전가요가 유행했다고 합니다.
長 侵天半 輪刀耀日光 긴 창은 하늘을 덮고 칼과 전차는 햇빛에 번쩍이네
上山吃獐鹿 下山吃牛羊 산위에서는 사슴과 노루를 잡지만 산아래에선 소와 양을 잡는다네
忽聞官軍至 提刀向前蕩 문득 들으니 관군이 왔다는데 창검으로 고구려를 친다하네 ,
譬如遼東死 斬頭何所傷 허나 요동에 가면 오직 죽음뿐 온 몸이 찔리고 머리가 잘릴 것을 ....
당시 수나라 백성들은 고구려를 공격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를 이렇게 표현 했던 것입니다. 이 노래가사처럼 수백만의 원혼을 만든 전쟁에서 결국 수나라는 졌습니다. 그렇다면 패자인 수나라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됐을까요?취재팀 걸어가고 8 전쟁이 끝난후 수양제가 머무렀다는 수양제의 궁궐터를 찾았다. 이 앞의 물이 궁궐의 해자고 저기 앞에 보니는 것이 수양제 궁궐의 옹성이다 수양제의 궁궐은 모두 차 밭으로 변해 있었다. 문이 있던 자리에는 길이 들어서 버렸다. 깜쪽같이 사라진 궁궐처럼 어쩌면 중국인들에게 수양제는 잊고 싶은 역사의 인물인지도 모른다. 고구려와의 전쟁에 실패한 후 수나라는 극도의 혼란에 휩싸였다. 그런와중에서도 수양제는 궁궐 100여개의 방에 미녀를 데려다 놓고 호위호식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에 패한지 4년 뒤인 618년,수양제는 고구려 원정군 사령관 우문술의 아들에게 피살당한다. 그해 중국에는 이세민이 세운 당나라가 새로운 통일왕조로 들어섰다. 전쟁이 끝난 지 5년후, 당은 고구려에 한 장의 국서를 보낸다. 우리나라와 귀국은 각자의 영토를 잘 보전하며 서로 화목하게 지내니 다행한 일입니다. 다만 수나라가 귀국을 침공하여 피해를 입히고 우리또한 피해가 크니 그것이 양국의 우호에 장애가 될까 두렵습니다. 먼저 당에 있는 귀국의 포로를 송환하오니 귀국에서도 우리의 포로를 돌려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삼국사기) 전쟁으로 국력이 쇄한 중국은 이렇듯 먼저 화해를 요청해 왔다. 이로써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명실상부한 패자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고구려를 큰 영토를 가진 국가,이렇게 막연하게 생각해 왔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16년동안 계속된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고구려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고구려는 독자적인 천하관과 문명을 가지고 있었고,군사강국이었으며 또한 경제대국이었습니다.이런 고구려가 존재하는 한 중국의 천하통일은 한낱 꿈에 불과했습니다. 오히려 중국의 영토, 문화,경제력까지 심각한 위협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그 생존이 걸린 절박함으로 수나라는 고구려와 전쟁을 해야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중국의 통일 왕조가 도전할 수밖에 없었고, 또 그 도전을 물리친 고구려의 힘!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발견한 고구려의 참모습입니다.

by 카피사루0 | 2008/02/12 00:00 | korea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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