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 1945년 북한 흥남서 원폭 개발·실험”

 

“일본 , 1945년 北 흥남서 원폭 개발·실험”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한국전쟁 때 흥남 초토화 이유”
 

2005-06-10 오후 5:16:08

 

 일본이 2차대전의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1945년 8월 패망 직전까지

북한의 흥남(지금의 함경남도 함흥)에서 원자폭탄을 개발해

바다 속 폭발실험까지 마쳤다는 주장이 제기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일본, 흥남에서 원폭 개발해 전세 역전 노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오는 12일 방영되는

‘끝나지 않은 비밀 프로젝트-

일본의 원자폭탄개발’ 편에서 이같은 주장을 제기할 예정이다.
  
  제작진이 일본의 ‘북한 흥남 원폭개발·실험’을 제기하게 된 배경은

최근 미국의 저널리스트 출신으로 이 문제에 천착해온 윌콕스

(‘전쟁의 비밀’ 저자) 씨에 의해 1947년 연합군사령부

(GHQ)의 관련 기밀 정보보고서가 발견됐기 때문.

당시 미군 세실 중령이 작성해 ‘세실보고서’로 불리고 있는

 

이 보고서에는 2차 대전 당시 일본이 북한의 흥남에서 원자폭탄을

개발한 사실을 확인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세실보고서’는 이에 앞서 1946년 10월 3일자 미국

<애틀란타신문>에 실렸던 한 기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애틀란타신문>은

당시 “미 범죄 수사국 요원이었던 데이빗 스넬이

종전직후 일본 장교 와카바야시를 신문하는 과정에서

이같은 정보가 입수됐다”고 보도했다.

나중에 ‘스넬보고서’로 이름 붙여진 와카바야시 신문내용에는

“1945년 8월 12일 새벽, 흥남 앞바다에서 섬광과 버섯구름을

동반한 거대한 폭발이 있었다”고 쓰여 있다.

결국 미 정부는 이러한 보도가 있은 직후 흥남에 대한

전면 재조사를 벌인 결과 이듬해 일본이 흥남에서 원자폭탄을

개발해 비밀리에 실험을 마쳤던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일본 원자폭탄 개발의 중심이었던 도쿄대 이화학연구소

연구원들의 모습.

 

 

연합군사령부 정보보고서는 또 일본이 흥남에서 원자폭탄 이외에도 1944년 영국 전역을 공포에 떨게 했던 독일제 장거리 미사일 V1, V2 생산을 ‘NZ’라는 암호명으로 진행해 왔다는

사실도 적시하고 있다. 나중에 암호명 NZ는 히틀러의 원폭개발계획과 같은 이름이었던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제작진은 여기에 당시 흥남에서 생산 공장을 목격했다는

이들의 증언도 덧붙이고 있다. 당시 흥남공업학교

학생으로 관련 공장에 자주 파견실습을 나갔던

문봉수 씨는

“보통 공장과는 달리 원자력 공장처럼 사방이 콘크리트로 지어져 있었다”며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보니 고성능 폭탄을 만들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또,일본의 원폭개발 핵심 멤버였던 유가와 히데키가 일단의 일행들과 자주 흥남에 출몰했다고 증언했다.
  
  여기다가 종전 직후 연합군사령부 원폭조사단 일원이었던 미국인 레온 톰슨 씨는 제작진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인들을 통해 원자폭탄 설계도를 볼 수 있었고, 정확한 지명은 생각나지 않지만 북한의 어딘가에 일본군부가 최대규모의 시설을 지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밝혔다.
  

독일에서 유학한 일본 핵물리학자들과 아인슈타인의

기념사진.

흥남, 전력 등 모든 여건 원폭 개발 최적지
  
  일본이 자국이 아닌 북한의 흥남에 원자폭탄 개발 공장을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제작진은 당시 일본 본토의 사정과 흥남의 지리적 여건 등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있다.
  
  일본은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국과의 전쟁에서 연전연승을 거듭했으나 1942년 5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참패한 뒤 전쟁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다급해진 일본은 전세를 단번에 역전시킬 특단의

조처가 필요했고, 군부는 일본 과학계의 최고 석학인

니시나 요시오 박사에게 원자폭탄 개발을

지시하게 됐다.
  
  이에 니시나 박사는 도쿄대 이화학연구소를 중심으로 이른바 ‘니호연구’로 불린

원자폭탄 개발 계획을 극비리에 추진, 마침내 입자가속기를 통해 우라늄 원석에서

 원자폭탄의 재료인 우라늄235를 분리하는데 성공했다.

우라늄은 독일을 통해 잠수함으로 대량 수입됐다.
  
  하지만 1945년 3월 미국이 일본 본토에 대한 공습을 시작하면서 사정은 여의치

않아졌다. 원자폭탄 개발의 중심이었던 이화학연구소도 B-29 폭격기의

무차별 공습으로 파괴돼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대비해

도쿄에서 4시간 거리에 있는 이시가와라는 마을에 별도의 연구소를 지어 관련

연구를 계속했다.
  

미국은 북한 흥남(현 함흥)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주요 폭격 목표로 정해놨다. 사진은 당시 미군의 주요 폭격 대상지역 명단.

 

 

한편으로 일본은 북한의 흥남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흥남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포항이나 창원과 같은 대단위 공업도시였다. 흥남은

1940년대 정점을 이뤄 총 부지만 6백만평에 종업원수만 4만5천여명에 달하고

있었다. 흥남은 또, 압록강 수계를 개발해 모두 3백20만㎾의 전력사용이 가능했다.

 이는 일본 본토 전력사용량의 절반이 넘는 양이었다. 전력은 원폭개발에

있어서도 필수조건이었다.
  
  미국 역시 이러한 점에 주목해 1945년 2월부터 수차례에 걸쳐 흥남일대를 정찰한

 뒤 주요 공격 목표물로 삼았고, 나중에 흥남이 북한과 소련의 세력권 안에

들어가자 한국전쟁 때 흥남을 초토화시켰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윌콕스는
  
  “겉으로 지구상 최초이자 최대의

피폭 피해국임을 주장해

매년 원폭 공격에 대한 성토와 

방송을 제작하고 있지만...

74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사토 수상이 그랬던 것처럼

사실은 핵폭탄 개발을 적극 추진하고

실전 연습까지 했었다.

 
1945년 8월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투하했던 미국인 조종사 폴 티베츠 예비역 준장이 2007년 11월1일(현지시간) 숨졌다.92세.
티베츠의 손녀 키아는 “할아버지가 3개월여 전부터 건강이 나빠져 이날 별세했다.”고 밝혔다. 그는 62년 전인 45년 8월6일 모친의 이름인 ‘에놀라 게이’로 명명한 애기(愛機)에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비밀계획 속에 개발된 우라늄 원자탄을 싣고 히로시마로 날아갔다. 마침내 이날 오전 8시 15분 9.44㎞ 상공에서 히로시마의 일본공군 본부를 겨냥해 원폭을 투하했다.B-29는 당시로서는 4개의 엔진을 단 최신예였다.
그는 자서전 ‘티베츠 이야기’에서 “거대하고 검붉은 버섯구름 띠가 4만 5000피트(13.7㎞) 상공까지 너비 3마일(약 4.9㎞)로 퍼지는 무시무시한 광경을 지켜봤다.”고 회고했다.B-29는 폭격으로 불길이 치솟는 파괴된 도시 상공을 피해 옆으로 날아갔다고 덧붙였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7만여명이 죽고 5만여명이 크게 다쳤으며 6만여채의 집이 잿더미로 변했다. 그 뒤로도 계속 퍼져나간 고열과 방사능으로 희생된 공식 사망자만 24만여명으로 추산된다.
티베츠는 자서전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적절한 조치였다.”면서 “원자탄 사용은 종전(終戰)을 앞당겨 더 생길 수많은  일본군과 일본인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95년 원폭투하 50돌 기념행사에서 ‘새벽을 불러들인 사나이’란 별명을 얻었다.
 
당시 30세의 대령이었던 티베츠와 14명의 부하는 1945년 8월 6일 오전 5톤에 달하는 원자폭탄 ‘리틀보이’를 히로시마에 투하했다. 7만~10만명의 민간인이 즉사했고 방사능에 오염된 이들도 수만명에 이르렀다. 3일 뒤 미국은 나가사키에도 두 번째 핵 폭탄을 떨어뜨렸고, 일본은 며칠 뒤 항복을 선언했다. 
 
 티베츠는 2005년에 열린 원폭 투하 60년 기념식에서 “임무를 맡게 됐을 때 감정적으로 힘들게 될 줄 알고 있었다”며 “우리도 감정이 있었고, 사람들을 죽이게 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최대한 빨리 살상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역할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애국적인 임무였고 해야 할 일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에서 맡은 일을 완벽하게 해냈다는 것은 자랑스럽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나는 매일 밤 잠을 잘 잔다”고 덧붙였다.
 
 1937년 공군에 입대하기 전 의대 학생이었던 티베츠는 전쟁 뒤 국방부에서 일했고 티베츠는 1966년 퇴역한 뒤 1985년까지 택시업을 했다. 
 
 평소 그는 자신을 화장해서 전쟁 당시 비행하기 즐겼던 영국 해협에 유골을 뿌려주기 바란다고 말해왔다.
 
 
 

방위상 “원폭투하 어쩔 수 없는 일”

 

규마 장관은 지난달 30일 지바() 현의 한 대학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원폭 투하로 무수한 사람이 비참한 운명을 겪었지만 그로 인해 전쟁이 끝났다는 게 나의 정리된 생각”이라며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원폭투하로 수백만 추가희생 막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을 정당화한 규마 후미오() 전 일본 방위상의 발언 파문을 계기로 이 문제에 대한 미국의 시각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미국 행정부의 핵비확산 담당 특사인 로버트 조지프(사진) 전 국무차관은 3일 미 국무부에서 기자들과 만나 원폭 투하에 대해 “결과적으로 많은 일본인의 생명을 구했다”며 “문자 그대로 수백만 명이 더 희생될지 몰랐던 전쟁을 끝낸 것으로 대부분의 역사가가 동의하는 내용”이라고 말했다.




 

 

피해자 일본은 있어도

가해자 일본은 없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지 60년을 맞아 두 도시는 물론 미국 등 세계 각지에서 ‘반핵’을 외치는 시민들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원자폭탄이 탄생한 뉴멕시코주의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 근처의 공원에서는 시민 수백여명이 “노 모어 히로시마, 노 모오 나가사키”라고 외쳤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사죄한다”는 현수막도 높이 쳐들었다. 부시 대통령의 클로포드 목장에서도 일본 원폭피해자단체 관계자들이 핵무기 폐기를 촉구했다.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평화공원에는 당시의 비참한 체험을 설명하는 피폭자들의 생생한 증언과 함께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평화주의자들이 목소리를 같이했다. ‘원폭의 날’ 만큼은 일본 국민 대다수가 피폭자들의 아픔을 같이하며 반핵·평화 행진에 동참한다. 그러나 원폭투하 60주년을 맞이한 뜨거운 추모 분위기는 어찌 보면 일본을 전쟁의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로 교묘히 위장하는 효과를 발휘한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은 지금도 세계 유일의 피폭국임을 내세워 평화를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야스쿠니를 참배하고 군사력을 강화하는 등 과거 회귀 성향을 보이고 있다. 집권 자민당은 최근 군대보유를 명기한 헌법 개정안을 내놓기도 했다. 한발 나아가 일각에서는 핵무장론도 일고 있다.

-헌법9조는 유린당하고 있다-

고이즈미는 6일 오전 히로시마시 원폭의날 기념식에 참석, “(핵폐기는) 국제사회가 하나가 되어 추진해가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은 유일한 피폭국으로 지금까지 선두에 서 왔으며, 앞으로도 핵폐기를 향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향후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대해선 “적절히 판단하겠다”며 간단히 답했다.

산케이신문은 나가사키 원폭의 날을 하루 앞둔 8일자 사설에서 ‘원폭을 투하한 것은 일본인이 아니다. 투하한 자의 손은 아직 씻어지지 않았다’는 인도의 팔 박사(도쿄재판 당시 피고인들에 무죄 주장)의 말을 인용하며 “(그의 말은) 원폭투하에서 사죄할 나라는 일본이 아니라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원폭은 통상의 전쟁범죄와는 달리, 일순간에 많은 비전투원의 생명을 앗아간 비인도적 행위다. 그러나 전후 연합군사령부(GHQ)는 원폭투하에 대한 일본국민의 비판을 봉쇄할려고 했다”고 꼬집었다. 이어 “(GHQ는) 신문과 방송 등을 이용해 원폭투하의 타깃이 일반 시민이 아니라 군사시설이었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가해자는 미군이며 일본은 피해자라는 점을 부각시킨 부분이다. 사설 마지막에는 “원폭투하에 관한 역사인식을 포함해 ‘전부 일본이 나빴다’식의 점령사관으로부터 하루빨리 탈피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실, 이러한 산케이의 움직임은 일찌감치 그 속내를 드러냈다. 지난 1일자 사설에서는 “같은 패전국인 독일에서도 국민들이 나치의 지도자를 용서하지 않는 이유는 나치가 행한 유대인 학살은 통상의 전쟁범죄와는 달리 인류사상 미증유의 계획적인 국가범죄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A급전범은 일본 국민들이 국내법으로 범죄자로 보지 않으며 용서했다”면서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대한 반발 세력에 강경한 대응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렇듯 ‘원폭’과 ‘유대인 학살’을 빗대는 과정에서 산케이신문이 강조하는 단어는 ‘통상의 전쟁범죄’다. 즉, 일본의 침략전쟁은 통상의 전쟁범죄이므로 왜 A급전범을 욕하고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비난하느냐는 억지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3일자 사설에서는 중국과 북한의 군사 위협에 호들갑을 떨며 일본(자위대)의 군비증강을 촉구했다.

‘분쟁 해결수단으로 전쟁을 포기하고, 이를 위해 무력을 갖지 않는다’고 명기한 일본 헌법 9조(일본인들은 평화헌법이라고 한다)가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는 ‘원폭의 날’. 지구의 비핵화를 외치는 이들의 순수한 화합의 장이 되지만, 고이즈미류의 정치인이나 언론에게는 대외적으로는 ‘일본은 평화를 지향한다’는 피켓을 내세우며 뒤로는 야스쿠니신사 참배와 군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절호의 날이 되는 셈이다.

이런 가운데 일본의 침략사에 종지부를 찍으며 잠들었던 군국주의를 부활시키려는 우익세력들의 기세 또한 거세다.

-“피폭 교훈, 송두리째 부정”-

히로시마 원폭의 날을 맞아 일본 언론들은 핵 파괴력의 잔인함과 피폭의 참상을 열거하며 핵 확산을 저지하기 위한 피폭국 일본의 역할을 강조했다. 특히 피폭 60주년을 맞아 일본의 비핵·평화정신이 변질되고 있다고 강도높게 비판한 것은 도쿄신문이었다.

도쿄신문은 4일자 사설에서 “핵무기가 없는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피폭국으로서 선두에 서왔다고 할 수 없다”고 지적한 뒤, 세계 유일의 피폭국임을 내세워 평화를 얘기하면서 야스쿠니를 참배하고 군사력을 강화하는 등 과거 회귀 성향을 보이는 것에 대해 “피폭의 참화에서 배웠던 교훈과 가치관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움직임”이라고 꼬집었다.

서구 언론으로부터의 화살도 이어졌다. 독일 일간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너 차이퉁은 “일본의 정치 지도자들은 일본을 세계대전 원인 제공자가 아닌 전쟁 희생자로 여기며, 과거사에 종지부를 찍으려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최근 일본 중의원이 통과시킨 ‘종전 60주년 결의안’이 10년 전과는 달리 ‘침략’과 ‘식민지배’란 표현을 삭제한 것을 꼬집은 것이다.

영국의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일본 지도자는 1970년 유대인 추모비에 무릎을 꿇었던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와 달리 14명의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에 매년 참배한다”면서 평화헌법 9조 개정, 자위대의 해외파병 합법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지위 요구까지 일본은 수십년간 평화주의에 위축된 ‘전투적 근육’을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교도통신과 AP통신의 공동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인 68%가 원폭 투하는 제2차세계대전을 끝내는 데 필요했다고 동의한 반면 일본인은 20%에 그쳤다. 이같은 국내 여론에 힘을 받은 일본 우익세력에게는 ‘원폭의 날’로 시작해 8월15일까지는 국민들에게 야스쿠니행 티켓을 발행하기 위한 행복한 주간이다.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는 얼마전 “북한의 핵·생화학 무기 위협은 오랜 잠에 빠져있던 일본을 깨워 재무장시킬것”이라며 “내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환영할만한 일”이라고 말했다. 아무생각 없이 지껄인 망언이라고 치부하기엔 치가 떨린다.

〈미디어칸 고영득기자 ydko@khan.co.kr〉

BBC 등 영국 언론은 전후 60년을 기념해 8월6일의 히로시마 원폭투하를 다양한 형태로 다루었다.

지난 5일 BBC 라디오에서는 한 남성의 피폭체험담과 전후 60년을 지나도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과학자의 말을 소개됐다.

아울러 “비행 전날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폭탄을 투하한 후 제때 빠져나오기 위해 정확한 투하 타이밍에 집중했다” “폭탄투하에 대해 후회는 하지 않는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일본인은 죽을 각오로 전투를 계속했을 것이고 희생자도 훨씬 더 나왔을 걸로 생각한다” 등의 당시 원폭을 투하한 승무원의 증언을 전했다.

특히 BBC 웹사이트는 폭탄이 떨어진 다음날의 각 신문 지면을 게재해 눈길을 끌었다.

‘데일리 익스프레스’는 ‘세계를 바꾼 폭탄’이라는 제목으로 “만일 영국 남서부 지방에 폭탄이 떨어졌다면 런던 중심지에서도 그 충격을 느낄수 있을 정도”라며 폭탄의 위력을 설명하며, 당시 처칠 수상이 말한 ‘신의 가호로 독일군을 내쫓았다’는 말을 그대로 인용해 보도했다.

‘데일리 메일’은 ‘30만의 도시가 거대한 화염 덩어리로 사라졌다’는 제목으로 “폭발은 무서울 정도로 거대했다. ‘오 마이 갓’이라는 말이 도시가 폭격된 모습을 본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 나왔다”는 당시 목격자의 말을 전했다.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동맹군이 원자폭탄을 발명했다-폭탄이 처음으로 일본에 떨어졌다’라는 제목으로 피해상황에 대한 상세한 말은 없고 동맹군의 과학 업적에 대해서만 보도했다. 피폭 피해 등 부정적인 정보를 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정보조작’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한편 영국 언론에 인터뷰를 한 생존자들은 “원인 제공자를 미국에만 돌리지 말고 왜 폭탄이 투하됐는지 일본 자신이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인류 사상 최초의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 6일로 60주년. 5일 일본 히로시마(廣島) 시내 ‘평화기념공원’과 원폭 투하 당시의 앙상한 철골이 그대로 보존된 ‘원폭 돔’ 주변은 참배객과 반전반핵 단체 회원, 취재진으로 크게 붐볐다. 행사 내용은 대개 일제 침략에 대한 반성은 외면한 채 ‘가해자’ 미국만 비판하는 것이어서 일본 사회 전반의 국수주의화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게 했다.》

▽추모장이 반미 선전장으로=5일 오전 10시 공원 내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 앞에서는 재일교포와 학생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36회 위령제가 열렸다.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평화를 간구하는 이들 사이에서 일본 여고생 걸스카우트 회원 20여 명이 눈길을 끌었다.

처음 이곳을 찾았다는 고교 2년생 니시무라 유코(西村裕子·16) 양은 “역사 시간에 배운 적이 없어 한국인 원폭희생자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면서 “강제연행에 대해서도 공부할 생각이며 한국인 친구들과도 사이좋게 지내겠다”고 다짐했다.

공원 여기저기에서는 반전반핵을 표방하는 민간단체 회원들이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죄 없는 어린이, 부녀자, 노인을 학살한 미국에 사죄를 요구하는 운동에 동참해 주십시오.”

회원들의 호소에 지방에서 대형버스로 참배하러 온 일본인들이 다투어 서명했다.

버스 정류장 등에 세워진 시민단체의 선전차량에서는 원폭 금지를 요구하는 집회가 6일 열린다는 안내 방송과 함께 반미 주장이 거듭됐다.

차 안에 있던 ‘다카노(高野)’라는 청년 회원은 “원폭을 투하하지 않아도 전쟁은 끝났을 텐데 미국 단독으로 일본을 침략, 점령하기 위해 잔혹한 학살을 했다”며 미국의 ‘비인도적 처사’를 비난했다. 그러나 그에게 일제 전쟁범죄에 대한 의견을 묻자 “솔직히 잘 모르겠다”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공원 내에서는 원폭 투하 직후의 검게 그을린 시체 사진 등 당시의 참상을 전하는 전시회도 열렸다. 대부분 일본의 원폭 피해만 강조했을 뿐 일제의 아시아 침략 전쟁에 따른 참상은 외면했다.

히로시마 시내의 원폭투하 60주년 기념사진전에서 만난 50대 여성 안내자는 “아시아 각국민이 힘을 모아 반핵 운동을 벌여야 한다”며 목청을 높였다. 아시아 침략의 참상에 관한 자료가 한 건도 없는 이유를 묻자 “이번 전시회는 어디까지나 원폭 투하를 기념하는 것”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잊혀져 가는 교훈=평화기념공원에는 1952년 세워진 원폭희생자 위령비가 있다. 지난달 26일 국수주의단체의 한 회원(27)이 비문을 훼손해 경찰에 구속됐다. ‘편히 잠드소서. 잘못은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니’란 비문 중 ‘잘못’이란 부위를 망치로 뭉개버린 것. 일본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왜 일본인 스스로 이런 말을 썼느냐는 것이 범인이 경찰에서 밝힌 훼손 이유였다.

비문은 6일 기념행사를 앞두고 원래대로 복원된 상태였다. 비석 내부 석실에는 원폭 희생자 23만7062명(5월 말 현재·원폭 투하 직후 숨진 12만여 명과 후유증으로 숨진 사람 포함)의 명부가 들어 있다.

가족과 함께 위령비 참배를 마치고 돌아서는 한 시민은 소감을 묻자 익명을 요구하며 반미 선전장으로 변한 공원 주위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그는 “과거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면서 일제 침략 전쟁의 가해 사실을 부인하려는 최근의 일본사회의 풍조를 우려했다.

아사히신문이 최근 전국의 피폭자 1만3000여 명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62%가 ‘미국은 사죄해야 한다’고 답했다. 또 전쟁 책임에 대해서는 ‘미국과 일본 쌍방에 있다’는 의견이 50%를 넘었다.

5일 평화기념공원 내 풍경은 한국 중국 등 일제 침략에 피해를 본 나라 국민으로서는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운 ‘일본인의 상식’을 반영하고 있었다.

지도에서 지운 독가스섬을 아십니까

 

피해 도시 히로시마는 있고 대량살상 무기

제조 공장의 히로시마는 없다?

[오마이뉴스 2006-02-22 16:42]    
▲ 오쿠노시마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입던 방독옷과 방독면만 등이 독가스자료관에 전시돼 있다.
ⓒ2006 효도 케이지
연간 100만명이 방문하는 히로시마시 원폭 투하 폭심지에 있는 평화기념공원. 직선과 원근법을 이용한 이 커다란 공원은 일본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건축가 니시타 겐조가 2차 세계 대전 중 '대동아건설기념'을 주제로 구상한 것을 바탕으로 1954년에 완성된 것이다.

공원 중심에 있는 위령비에는 "편하게 주무세요. 잘못은 다시 하지 않으니까"라고 새겨져 있다. 위령비 뒤에는 세상에서 핵무기가 없어질 때까지 켜놓는다는 촛불이 있다. 위령비 정면에서 보면 그 촛불이 아지랑이처럼 원폭 피해의 상징인 원폭돔에 흔들려 보인다.

일본의 많은 학생들은 수학여행으로 이곳을 방문하고 매년 8월 6일에는 총리가 방문해 기원 행사를 한다. 원근법의 시각적 효과로 가득 찬 이 공원에서 회한의 집단의식과 위령의 공동체가 형성된다. 하지만 기념비에 새겨진 "잘못"이란 과연 무엇인가? 무모한 전쟁을 기도한 잘못을 후회하는지? 혹은 아시아를 침략한 잘못을 후회하는지?

일본인 누구나 '히로시마'를 듣게 되면 조건반사적으로 "원폭이라는 비인도적 무기의 피해지"라고 상기한다. 그러나 히로시마에는 대부분의 일본인이 모르는 또 하나의 얼굴이 있다.

지도에서 지워진 섬

▲ 독가스통이 있던 당시의 사진을 보이면서 설명하는 야마우치씨.
ⓒ2006 효도 케이지
히로시마시에서 동쪽으로 약 70km에 위치한 오쿠노시마는 다다노우미항에서 배를 타면 불과 10분만에 도착하는 둘레 4km의 작은 섬이다. 현재는 국립 휴양지로 지정돼 있으며 숙박시설과 해수욕장 등이 있어 가족 동반객들이 많이 방문한다. 한가로운 세토나이카이에 둘러싸인 섬은 흰 토끼가 많이 사는 등 목가적인 풍경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섬에 일본인들이 잊고 싶은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다는 것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일본 육군 독가스 제조 공장터가 그것이다. 1929년부터 1945년까지 16년간, 이 공장에서는 6616톤의 독가스가 제조됐으며 이 섬은 군사기밀을 지키기 위해 지도에서 지워졌다. 이 섬에서 제조된 독가스의 절반은 중국 대륙으로 보내져 전쟁에 사용됐다.

나는 지난해 8월 오쿠노시마에서 역사 가이드를 하는 야마우치 마사유키씨의 안내로 독가스 제조공장의 흔적을 찾았다.

1961년에 시작된 휴양지 건설공사로 독가스를 만들던 공장이 있던 곳이 지금은 테니스 코트와 수영장 등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발전소, 독가스 저장고 등의 흔적은 섬의 곳곳에 남아 있다.

야마우치씨는 당시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사라진 옛터를 설명했다. 제조된 독가스는 직경 2m, 길이 5m 정도의 탱크에 보관됐었다. 현재 그 자리에는 저장고 금속의 파편이 널려 있었다.

이러한 곳을 휴양지로 만든 것이 놀라운 일이지만 더 놀랍던 것은 아직도 땅속에 독가스탄이 묻혀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개발할때마다 독가스로 오염된 것으로 추측되는 토양을 끊임 없이 파낸다. 파내진 흙더미는 섬의 한곳에 천 덮개 밑에 쌓여있다.

야마우치씨 말에 따르면 2차대전 후 독가스탄 처리를 맡은 화학회사 테이진이 약 65만발의 구토성 가스탄들을 오쿠노시마에 묻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섬의 일각에는 이러한 독가스 제조의 역사를 알리는 '독가스 자료관'이 있다. 독가스 제조에 종사하다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중심이 돼 설립한 이 자료관에는 독가스를 제조하던 기계, 종업원이 입던 방독복, 독가스탄, 중국에서의 사용된 사진과 문서등이 보관돼 있다.

사회과 교사생활을 하다 퇴직해 현재 오쿠노시마 독가스 제조의 역사 연구와 가이드를 하고 있는 야마우치 씨는 이렇게 말했다.

"저희가 이 섬의 독가스 제조실태를 조사하게 된 계기는 이 섬에서 일하고 있던 사람들의 건강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조사를 계속하는 가운데 히로시마에 대해서 피해의 측면 뿐만 아니라 가해 측면을 다음 세대에게 알려야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섬에는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들이 평화학습과 수학여행으로 연간 약6만명이 방문한다. 중국에서도 독가스전의 증언자와 연구자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온갖 독가스가 만들어진 곳

오쿠노시마에서 어떤 사람들이 일하고 어떤 종류의 독가스를 만들었을까?

전쟁 당시 이 섬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소수의 기술자 외에는 "일하면서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선전에 속아 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동원된 히로시마 부근의 소년소녀들이 있다. 소년소녀들은 "독가스 무기는 고통이나 유혈을 수반하지 않기 때문에 비인도적이지 않다"는 군의 거짓말에 속았고 또 오쿠노시마에서 일한 내용은 부모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독가스는 오쿠노시마뿐만 아니라 일본군 전체에서 암호처럼 색 이름으로 분류됐다. 예를 들어 최류가스는 '미도리(녹색)'. 호흡기와 점막을 해치는 구토성(재채기성) 가스는 '아카(빨간색)'. 피부·점막을 진물러 눈·호흡기·소화기를 해치는 더 강력한 미난성 가스는 '기(노란색)'라고 불렸다.

구토성 가스는 비치사성 가스라고 하지만 농도가 진한 경우 치사 능력을 가진다.

또 치사성이라고 하는 미난성 가스를 피하기 위해서는 방독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또한 냄새 때문에 방독복으로 온몸을 가릴 필요가 있다. 머스터드 가스라고 불리는 이페릿이나 루이사이트가 이것에 해당된다.

이런 독극물을 취급하기 때문에 독가스 공장에서 일하던 소년소녀들이 다치는 사고가 많았다. 2차대전 후 실시한 종업원 전체에 대한 건강조사에 의하면 만성 기관지염이나 폐암 등의 질병률이 매우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 지금도 독가스에 오염된 것으로 추측되는 토양이 끊임 없이 파내지고 있으며, 이 흙들은 비닐 더미에 덮혀 보관되고 있다.
ⓒ2006 효도 케이지
일본군 독가스전의 실태

오쿠노시마에서 만들어진 독가스가 어떻게 사용됐을까?

일본에서 독가스전의 실태조사·연구가 시작된 것은 1984년으로 극히 최근 일이다. 역사학자 아와야 겐타로 교수가 1984년 미국국립공문서관(NARA)에서 독가스전의 증거 서류를 발굴한 것이 그 시작이다. 이를 <아사히 신문>이 특종해 과거의 독가스작전이 일본 사회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에서 최초로 자료가 발굴된 이유는 일본군이 항복한 후 독가스 작전에 관한 자료·기록을 소각했고, 현재도 방위청이 보관중인 중요 자료는 비공개로 분류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일본군이 전쟁에서 독가스에 의존하게 되었는가. 일본의 독가스전의 연구는 아와야 교수나 종군위안부 강제징용 실증 연구로 알려져 있는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 등을 중심으로 진행됐고 중국 연구자들도 현장조사, 청취조사 등을 진행하고 있다.

1899년 체결된 '독가스의 금지에 관한 헤이그 선언' 및 1900년 체결된 '헤이그 육군전쟁 협약'으로 독가스 사용이 금지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1차 세계대전 구미국가들간에 격렬한 독가스전이 전개되면서 100만명 전후의 사상자를 냈다.

그 반성으로 제1차 세계대전 후 국제 여론은 독가스의 전면사용 금지로 흐르고 있었지만 일본군은 독가스 연구와 제조를 준비했다. 그 배경에는 1920년대 일본 경제 불황으로 일본군의 인원 삭감과 무기의 '현대화'가 있었다. 그 일환으로 오쿠노시마에 육군 독가스 공장이 건설된 것이다.

오쿠노시마에서 제조된 독가스 무기의 원재료는 미츠이·스미토모·미츠비시·후루카와 등 재벌 기업들이 납품했다.

요시미씨 연구에 따르면 1930년 만주사변 이후 국지적이 벌어지면서 최루성 가스 등의 비교적 덜 독한 독가스가 사용됐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군이 보다 강력한 구토성 가스를 사용하게 된 것은 1937년 발생한 중일전쟁 때였다. 국민당 군대의 반격에 시달리던 일본군은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였으며 특히, 전황이 나쁠때나 험난한 지형에서 침공할 때 독가스를 사용했다.

독가스 사용은 철저하게 은폐되었다. "사용후에는 독가스통을 가지고 돌아오라"는 지시가 내려졌고, 서방 기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도시지역에서 사용을 피했으며 한번 사용할 경우 가능한 적을 섬멸(1938년 산서성 진남(晋南) 작전에서의 육군 지령)해서 증거를 은멸하라고 했다. 독가스로 괴로워하는 중국 병사들을 입막음하기 위해서 칼로 죽인 것은 이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즉 오쿠노시마에서 일하는 소년소녀들에게는 독가스가 고통을 야기하지 않는 좋은 무기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전쟁터에서 무자비한 섬멸전에 독가스를 사용했던 셈이다.

더욱 더 악화딘 독가스전

 
▲ 전후 오쿠노시마에서 독가스를 처리하는 모습.
ⓒ2006 독가스섬역사연구소 야마우치 마사유키
1939년 8월 관동군사령부 밑에서 중국 동북부에 사는 60여명의 중국인에게 청산가스의 생체실험을 실시했다. 게다가 그 즈음부터'기' 즉 미난성가스를 사용하기 시작하는 등 독가스 사용은 더욱 심해졌다. 특히 팔로군 게릴라에 시달리고 있던 일본군은 독가스로 복수했다. "다 죽여, 다 태워, 다 빼앗는다"는 삼광작전에서 침공·후퇴할 때 독가스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일본 독가스 작전은 마침내 국제사회에 노출되었다. 미국 저널리스트 잭 벨덴은 1941년 10월 후베이성 의창에서 국민당군과의 공방전에서 후송된 중국인 병사로부터 비정상적인 피부의 상처를 취재해 보도하면서 일본군의 독가스 사용실태가 구미권에 알려졌다.

이후 미국은 대일 독가스전 계획을 작성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일본군은 이미 일본보다 강력한 독가스 무기를 보유하고 있던 미국의 복수를 우려해 미군이나 영국에 대해서는 극히 한정적으로 독가스를 사용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1944년 7월까지 비난성가스 등의 강력한 독가스를 사용했다.

일본이 동남아에서 미국에 대한 독가스 선제 공격을 벌인 데 대한 보복으로 미국은 일본 본토 공습 작전에서 당초 독가스 사용을 계획하고 있었다. 도쿄·나고야·오사카 등의 군사시설이 있는 도시마다 독가스탄을 투하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예정보다 빨리 원폭이 투하돼 일본이 항복하면서 대일 독가스 작전은 실행되지 않았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일본군은 전쟁범죄의 기소를 피하기 위해 독가스 작전에 관한 문서기록을 소각하고 남은 독가스 무기도 폐기하거나 투기했다.

책임 묻지 않은 전쟁범죄...독가스 피해 외면한 일본 정부

일본군의 중국에 대한 독가스 사용은 중일 양국이 비준한 '독가스의 금지에 관한 헤이그 선언'을 분명히 위반한 전쟁 범죄이다. 그러나 1946년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서 일본군의 독가스 사용은 여러 가지 증거가 제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형사처벌되지는 않았다.

그 배경에는 독가스 무기에서 우위에 서있던 미국이 소련과의 군사패권 경쟁에서 스스로 손을 묶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독가스전을 지휘한 지도자들은 연합국에 의해서 재판받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1997년에 비준한 화학무기 금지조약에 의해 10년 이내에 국내 외에 폐기된 화학무기를 처리하는 의무가 있다. 그 처리사업에 현재까지 약 485억엔(한화 4100억원)의 비용을 투자했지만 아직도 많은 독가스가 중국 각지에 남아 있어 기한인 2007년까지 끝내기 어려운 전망이다.

폐기된 독가스탄은 지금도 피해를 발생시키고 있다. 일본에서는 2002년부터 2003년에 이바라기현과 후쿠오카현에서 땅에 묻힌 독가스탄을 파낸 사람이 피독된 사건이 일어났다. 중국에서도 투기된 독가스에 의한 사상 사고가 계속 발생하고 있다. 2003년 헤이룽장성 치치하얼시에서는 일본군이 투기한 미란성 독가스캔을 땅속에서 파내다 44명이 피독, 1명이 사망한 사고가 일어났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국내 및 중국의 피해자들에게 사과도 배상도 하지 않고 있다. 치치하얼시의 피해자에게 폐기 가스의 처리라는 명목으로 간접적으로 돈을 지불하고 있을 뿐이다. 또 비치사성 가스를 사용한 것은 시인하지만 치사성 가스는 사용하지 않았다는 종래의 견해를 바꾸지 않고 있다. 방위청에 보관되고 있는 자료의 공개와 피해자에게의 사과 등 일본 정부의 성실한 대응이 요구된다.

피해자와 가해자.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진 한국 학생들이 오쿠노시마를 방문한 뒤 쓴 기행문을 보니 일본이 자기 역사를 직시해 왔는지 의문을 든다. 고교생 최한결씨는 이렇게 썼다.

"60년간 이렇게 놓여져 있는 더미들을 보며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일본이 그들의 가해를 인정하고 피해를 말했다면 일본은 당당해 보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역사 감추기에 급급한, 아직도 그들은 일부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그들을 보자니 몸을 비겁하게 수그리고 있는 일본이 눈에 그려졌다."

그렇다. 일본 대부분의 역사교육은 피해의 역사를 보면서 함께 가해의 역사를 돌아보는 서로 다룬 시각의 균형이 부족했고 지금도 그렇다.

초등학생 이예은씨는 "전혀 들어보지 못한 독가스 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며 "앞으로도 독가스와 같은 무서운 무기를 만들게 아니라, 세계와 하나 되어 미래를 향해 나아가 세계의 평화를 만들어 갔으면 한다"고 썼다.

그 글을 보면서 원폭돔 위령비의 비문 "잘못을 다시 하지 않도록"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들의 원폭의 피해는 너무나 비참하고 억울한 사건이고

자신들의 대량살상무기 공장의 건설은 정당하다는건 일본만의 생각방식?

 

이스라엘 역사박물관 개관식에 일본 초청안해..

▲ 유대인학살박물관 개관식을 보도한 <마아리브> 3월 16일자 1면.

 

[이스라엘 현지취재] 일본이 배워야 할 독일의 사죄방식 
 


지난 3월 15일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는 독일 나치 치하에서 자행된 유대인 학살 자료들을 전시해 놓은 야드바셈 유대인학살박물관 개관식이 열렸다. 세계 40여개국의 대통령과 수상, 외무장관이 참석한 국제 행사로, 이스라엘에선 최근 10여년만에 최대 외국 국빈이 참석한 대규모 행사였다.

코피 아난 사무총장은 이미 1주일 전에 이스라엘을 방문했고, 유엔의 주요 국가들이 다각도로 개관식에 참석했다. 미국 부시 대통령은 뉴욕시장 블룸버그에게 미국 방문단 대표로 유대인학살박물관 개관식에 참석케 했다.

이스라엘, 일본 인사 초청 안해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번 행사에 일본 인사는 한 명도 초청하지 않았다. 우연일 수도 있겠으나, 이스라엘 최대 일간지 <예디오트 아하로노트>는 왜 일본을 초청 대상에서 제외시켰는지를 다음날 정치면 사설 옆에 실어 그 관심이 증폭되었다.

▲ 지난 3월15일, 예루살렘 유대인학살박물관 개관식에 일본이 참석하지 못한 이유를 다룬 현지 기사. 이스라엘 최대 일간지 <예디오트 아하로노트> 3월 15일자 3면.

<예디오트 아하로노트>의 시각은 곧 전 세계 외신에 또 다른 뉴스거리가 되었고, 왜 유엔의 주요 국가들과 세계의 귀빈들이 참석한 행사에 일본이 제외되었는가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때가 마침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최근 친히 이스라엘 수상과 팔레스타인 수반을 일본으로 초청해 두 나라의 평화 진전에 기여하고자 한 외교 노력이 진행 중이다. 일본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을 위한 포석의 일환으로 외교 강국 이미지를 조성하려는 노력에서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외교문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분쟁이다. 외교 강국으로 부상하려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안에 어떠한 경로로든 참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유엔 주요 국가들이 다 참석한 이 행사에 일본이 아예 초청조차 받지 못한 것이다.

일, 유대인 학살에 원폭 피해 편승 시도

이 외교적 소외는 일본의 외교뿐만 아니라 그들의 왜곡된 역사의식이 세계 외교무대에서 철퇴를 맞은 것이다. 일본은 이번 유대인학살박물관 개원에 즈음해 자신의 역사를 이 유대인학살박물관 개원에 편승하려 시도했다고 한다.

올해는 2차 대전 60주년을 맞이한 해로, 독일 나치 치하에서 유대인의 학살 및 핍박에 종지부를 찍는 해로 박물관 개관 시기를 맞추었다.

일본은 자신들 역시 원폭 피해 60주년을 맞는 해로 두 사건의 의미를 함께 되새길 수 있게 박물관을 함께 공유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즉, 유대인의 희생을 성공적으로 부각시킨 대표적인 상징인 유대인학살박물관을 일본의 원폭피해를 알리는 장소로 쓸 수 있도록 요구해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정부는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공교롭게도 이번 행사에 일본측 인사는 한 명도 초청하지 않았다.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피해를 유대인 학살과 비교하려 하였다는 것 자체가 분노를 살 일이었다.

즉, 일본이 2차대전을 일으킨 전범 국가로 사죄와 용서를 구할 처지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자신들의 원폭 피해를 의도적으로 부각시켜 마치 자신들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인 양 국제 사회에 이미지를 부각시키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반유대주의 측에게 유대인학살이 과대 포장되었다는 끊임없는 의혹에 시달려온 유대인들에는 더한 모독이었다.

일본이 배워야 할 것은 독일의 사죄방식

이번 유대인학살박물관 행사에서 특히 주목을 받는 것은 이스라엘과 독일의 관계 변화였다. 일본이 배워야 할 것은 바로 독일의 사죄 방식이다. 독일은 그 학살의 주인공으로 현재까지 적극적인 사죄와 반성으로 이스라엘에 신뢰를 쌓아왔다.

지난 2월 2일 독일 쾰러 대통령이 수교 20주년을 기념해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예정된 독일 대통령의 이스라엘 국회 연설을 앞두고, 이스라엘 국회에서 독일 대통령의 독일어 연설을 반대하였다. 나치 치하에서 듣던 공포의 독일어를 유대국가 이스라엘 국회에서 울려 퍼지게 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유대인들의 반독일 정서는 국민은 물론 현 국회의원들 중에도 직접적인 피해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법무장관이었던, 현 야당의 대표인 토미 라피드 의원도 부모가 나치에게 희생당한 대표적인 피해자였다.

하지만 일부 극우 의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국을 방문한 외국 대통령의 예우 차원에서 독일어 연설을 허락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독일 대통령의 연설은 어떤 불상사나 외교 결례가 일어날지 모르는 긴장 속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의 재치는 화해와 감동의 연설을 연출했다. 그는 연설의 첫 문장을 애써 배운 히브리어로 또박 또박 읽으며 시작했다. 그리고 자국어 독일어로 연설문을 읽어나갔다.

하이라이트는 과거사 사죄 부분이었다. 이 부분에서 독일 대통령은 마침내 눈물을 흘렸다. 굵은 눈물 방울이 카메라에 포착되었다. 유대인 의원들은 물론 이스라엘 국민들에게 감동으로 다가왔고, 다음날 이스라엘 신문에는 독일 대통령의 두 눈이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그래서였을까? 이스라엘 정부는 건국 이래 처음으로 이번 행사에 독일산 벤츠를 대거 정부 공식행사에 투입했다. 이스라엘은 학살 주범 나치 독일을 경멸하며 독일 상품을 반대해 왔다. 그 중 하나가 독일 차 벤츠의 공용 사용 금지였다. 유대인 학살박물관 개관식에 참석한 외국 국빈들을 숙소에서 박물관까지 모든 차량을 벤츠로 바꾼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유대인의 학살박물관에 동승해야 할 민족은 일본이 아니라 우리 한민족이다. 자신들이 희생자라고 주장하는 일본은 오히려 전범으로 사죄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일본의 역사의식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부터 철저히 사죄하고 용서를 구해야 하는 교양을 갖춰야 한다. 특히 자신들이 국제무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싶어 하고, 유엔의 상임이사국에 진출하려는 강한 열망이 있다면 우선 그에 걸맞은 국제 양식과 교양부터 가져야 한다.

하필이면 유대인들에게서 '철퇴'를 맞은 일본의 국제적인 해프닝이 벌어진 때가, 지구 반대편 우리 한반도 땅인 독도를 자국 영토라고 우겨대며 역사교과서 왜곡을 추진하는 시점이라는 점에서 일본은 큰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은 아직도 멀었다.  <오마이뉴스>

 

※ 독일은 지난 1950년 국적과 거주지에 관계없이 전쟁 희생자를 위한 ‘연방원호법’을 제정, 지금까지 세계 80개국에 살고 있는 나치 피해자 및 희생자들에게 1400억 마르크 이상을 지불했다. 기업의 강제노동 피해자 등에 대한 책임도 인정, 정부와 기업이 참여한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라는 이름의 재단을 만들어 기금 25억 마르크(1조5000억원)를 조성했다.

 

유대인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1952년 이스라엘과 교섭을 통해 성립시킨 룩셈부르크 협정에 따라 34억5000만 마르크를 지불했다. 1956년 연방보상법을 통해 인종ㆍ신앙ㆍ세계관 혹은 정치적 이유나 나치즘에 대한 저항 운동 등의 이유로 박해받은 사람에게 약 679억 마르크를 지불했다.

 

독일은 특히 1953년 런던채무협정에서 통일 후로 연기됐던 구소련 및 동구 제국의 전쟁피해 검토 문제에 대해서도 통일 직후인 1992년 새로 폴란드와 러시아 등 구동구권 여러 국민이 입은 과거 전쟁피해에 대한 사죄와 보상에 착수했다.

 

1992년 4월28일 폴란드에 화해기금을 설치하고 여기에 5억 마르크를 제공함으로써 통일독일은 나치 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 과거 독일기업에서 강제노동에 복무한 사람들에 대한 보상에 성의를 보였으며 1993년 1월29일 러시아, 벨로루시, 우크라이나에도 10억마르크를 지불키로 약속했다.

 

2000년 7월 17일에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피해를 본 외국인들에게 배상하기 위해 미국, 이스라엘, 폴란드, 러시아, 체코, 우크라이나 등과 국제협정을 체결했다. 이는 정부와 민간이 힘을 합쳐 자신들의과거의 잘못을 솔직히 사죄하고, 그 표시로 1백억 마르크라는 엄청난 배상을 감당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일본의 경우 냉전의 격화와 미국의 비호 아래서 제대로 된 배상없이 경제재건에 나서게 됐고 이제까지 이러한 ‘무임승차’가 국제사회의 지적거리로 남아있는 실정이다. 또한 아직까지도 2차 대전 당시 조선인들을 혹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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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피사루0 | 2008/06/18 23:21 | 반일 모드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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