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6월 18일
“일본 , 1945년 북한 흥남서 원폭 개발·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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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한국전쟁 때 흥남 초토화 이유” | ||
2005-06-10 오후 5: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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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2차대전의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1945년 8월 패망 직전까지
북한의 흥남(지금의 함경남도 함흥)에서 원자폭탄을 개발해
바다 속 폭발실험까지 마쳤다는 주장이 제기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일본, 흥남에서 원폭 개발해 전세 역전 노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오는 12일 방영되는
‘끝나지 않은 비밀 프로젝트-
일본의 원자폭탄개발’ 편에서 이같은 주장을 제기할 예정이다.
제작진이 일본의 ‘북한 흥남 원폭개발·실험’을 제기하게 된 배경은
최근 미국의 저널리스트 출신으로 이 문제에 천착해온 윌콕스
(‘전쟁의 비밀’ 저자) 씨에 의해 1947년 연합군사령부
(GHQ)의 관련 기밀 정보보고서가 발견됐기 때문.
당시 미군 세실 중령이 작성해 ‘세실보고서’로 불리고 있는
이 보고서에는 2차 대전 당시 일본이 북한의 흥남에서 원자폭탄을
개발한 사실을 확인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세실보고서’는 이에 앞서 1946년 10월 3일자 미국
<애틀란타신문>에 실렸던 한 기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애틀란타신문>은
당시 “미 범죄 수사국 요원이었던 데이빗 스넬이
종전직후 일본 장교 와카바야시를 신문하는 과정에서
이같은 정보가 입수됐다”고 보도했다.
나중에 ‘스넬보고서’로 이름 붙여진 와카바야시 신문내용에는
“1945년 8월 12일 새벽, 흥남 앞바다에서 섬광과 버섯구름을
동반한 거대한 폭발이 있었다”고 쓰여 있다.
결국 미 정부는 이러한 보도가 있은 직후 흥남에 대한
전면 재조사를 벌인 결과 이듬해 일본이 흥남에서 원자폭탄을
개발해 비밀리에 실험을 마쳤던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일본 원자폭탄 개발의 중심이었던 도쿄대 이화학연구소 연구원들의 모습.
연합군사령부 정보보고서는 또 일본이 흥남에서 원자폭탄 이외에도 1944년 영국 전역을 공포에 떨게 했던 독일제 장거리 미사일 V1, V2 생산을 ‘NZ’라는 암호명으로 진행해 왔다는 사실도 적시하고 있다. 나중에 암호명 NZ는 히틀러의 원폭개발계획과 같은 이름이었던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이들의 증언도 덧붙이고 있다. 당시 흥남공업학교 학생으로 관련 공장에 자주 파견실습을 나갔던 문봉수 씨는 “보통 공장과는 달리 원자력 공장처럼 사방이 콘크리트로 지어져 있었다”며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보니 고성능 폭탄을 만들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일본인들을 통해 원자폭탄 설계도를 볼 수 있었고, 정확한 지명은 생각나지 않지만 북한의 어딘가에 일본군부가 최대규모의 시설을 지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밝혔다.
![]() 1945년 8월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투하했던 미국인 조종사 폴 티베츠 예비역 준장이 2007년 11월1일(현지시간) 숨졌다.92세. 티베츠의 손녀 키아는 “할아버지가 3개월여 전부터 건강이 나빠져 이날 별세했다.”고 밝혔다. 그는 62년 전인 45년 8월6일 모친의 이름인 ‘에놀라 게이’로 명명한 애기(愛機)에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비밀계획 속에 개발된 우라늄 원자탄을 싣고 히로시마로 날아갔다. 마침내 이날 오전 8시 15분 9.44㎞ 상공에서 히로시마의 일본공군 본부를 겨냥해 원폭을 투하했다.B-29는 당시로서는 4개의 엔진을 단 최신예였다. 그는 자서전 ‘티베츠 이야기’에서 “거대하고 검붉은 버섯구름 띠가 4만 5000피트(13.7㎞) 상공까지 너비 3마일(약 4.9㎞)로 퍼지는 무시무시한 광경을 지켜봤다.”고 회고했다.B-29는 폭격으로 불길이 치솟는 파괴된 도시 상공을 피해 옆으로 날아갔다고 덧붙였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7만여명이 죽고 5만여명이 크게 다쳤으며 6만여채의 집이 잿더미로 변했다. 그 뒤로도 계속 퍼져나간 고열과 방사능으로 희생된 공식 사망자만 24만여명으로 추산된다. 티베츠는 자서전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적절한 조치였다.”면서 “원자탄 사용은 종전(終戰)을 앞당겨 더 생길 수많은 일본군과 일본인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95년 원폭투하 50돌 기념행사에서 ‘새벽을 불러들인 사나이’란 별명을 얻었다. 당시 30세의 대령이었던 티베츠와 14명의 부하는 1945년 8월 6일 오전 5톤에 달하는 원자폭탄 ‘리틀보이’를 히로시마에 투하했다. 7만~10만명의 민간인이 즉사했고 방사능에 오염된 이들도 수만명에 이르렀다. 3일 뒤 미국은 나가사키에도 두 번째 핵 폭탄을 떨어뜨렸고, 일본은 며칠 뒤 항복을 선언했다. 티베츠는 2005년에 열린 원폭 투하 60년 기념식에서 “임무를 맡게 됐을 때 감정적으로 힘들게 될 줄 알고 있었다”며 “우리도 감정이 있었고, 사람들을 죽이게 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최대한 빨리 살상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역할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애국적인 임무였고 해야 할 일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에서 맡은 일을 완벽하게 해냈다는 것은 자랑스럽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나는 매일 밤 잠을 잘 잔다”고 덧붙였다. 1937년 공군에 입대하기 전 의대 학생이었던 티베츠는 전쟁 뒤 국방부에서 일했고 티베츠는 1966년 퇴역한 뒤 1985년까지 택시업을 했다. 평소 그는 자신을 화장해서 전쟁 당시 비행하기 즐겼던 영국 해협에 유골을 뿌려주기 바란다고 말해왔다. 日방위상 “원폭투하 어쩔 수 없는 일”
규마 장관은 지난달 30일 지바(千葉) 현의 한 대학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원폭 투하로 무수한 사람이 비참한 운명을 겪었지만 그로 인해 전쟁이 끝났다는 게 나의 정리된 생각”이라며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원폭투하로 수백만 추가희생 막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을 정당화한 규마 후미오(久間章生) 전 일본 방위상의 발언 파문을 계기로 이 문제에 대한 미국의 시각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미국 행정부의 핵비확산 담당 특사인 로버트 조지프(사진) 전 국무차관은 3일 미 국무부에서 기자들과 만나 원폭 투하에 대해 “결과적으로 많은 일본인의 생명을 구했다”며 “문자 그대로 수백만 명이 더 희생될지 몰랐던 전쟁을 끝낸 것으로 대부분의 역사가가 동의하는 내용”이라고 말했다. ![]() ![]() |
지난 2월 2일 독일 쾰러 대통령이 수교 20주년을 기념해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예정된 독일 대통령의 이스라엘 국회 연설을 앞두고, 이스라엘 국회에서 독일 대통령의 독일어 연설을 반대하였다. 나치 치하에서 듣던 공포의 독일어를 유대국가 이스라엘 국회에서 울려 퍼지게 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유대인들의 반독일 정서는 국민은 물론 현 국회의원들 중에도 직접적인 피해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법무장관이었던, 현 야당의 대표인 토미 라피드 의원도 부모가 나치에게 희생당한 대표적인 피해자였다.
하지만 일부 극우 의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국을 방문한 외국 대통령의 예우 차원에서 독일어 연설을 허락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독일 대통령의 연설은 어떤 불상사나 외교 결례가 일어날지 모르는 긴장 속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의 재치는 화해와 감동의 연설을 연출했다. 그는 연설의 첫 문장을 애써 배운 히브리어로 또박 또박 읽으며 시작했다. 그리고 자국어 독일어로 연설문을 읽어나갔다.
하이라이트는 과거사 사죄 부분이었다. 이 부분에서 독일 대통령은 마침내 눈물을 흘렸다. 굵은 눈물 방울이 카메라에 포착되었다. 유대인 의원들은 물론 이스라엘 국민들에게 감동으로 다가왔고, 다음날 이스라엘 신문에는 독일 대통령의 두 눈이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그래서였을까? 이스라엘 정부는 건국 이래 처음으로 이번 행사에 독일산 벤츠를 대거 정부 공식행사에 투입했다. 이스라엘은 학살 주범 나치 독일을 경멸하며 독일 상품을 반대해 왔다. 그 중 하나가 독일 차 벤츠의 공용 사용 금지였다. 유대인 학살박물관 개관식에 참석한 외국 국빈들을 숙소에서 박물관까지 모든 차량을 벤츠로 바꾼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유대인의 학살박물관에 동승해야 할 민족은 일본이 아니라 우리 한민족이다. 자신들이 희생자라고 주장하는 일본은 오히려 전범으로 사죄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일본의 역사의식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부터 철저히 사죄하고 용서를 구해야 하는 교양을 갖춰야 한다. 특히 자신들이 국제무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싶어 하고, 유엔의 상임이사국에 진출하려는 강한 열망이 있다면 우선 그에 걸맞은 국제 양식과 교양부터 가져야 한다.
하필이면 유대인들에게서 '철퇴'를 맞은 일본의 국제적인 해프닝이 벌어진 때가, 지구 반대편 우리 한반도 땅인 독도를 자국 영토라고 우겨대며 역사교과서 왜곡을 추진하는 시점이라는 점에서 일본은 큰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은 아직도 멀었다. <오마이뉴스>
※ 독일은 지난 1950년 국적과 거주지에 관계없이 전쟁 희생자를 위한 ‘연방원호법’을 제정, 지금까지 세계 80개국에 살고 있는 나치 피해자 및 희생자들에게 1400억 마르크 이상을 지불했다. 기업의 강제노동 피해자 등에 대한 책임도 인정, 정부와 기업이 참여한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라는 이름의 재단을 만들어 기금 25억 마르크(1조5000억원)를 조성했다.
유대인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1952년 이스라엘과 교섭을 통해 성립시킨 룩셈부르크 협정에 따라 34억5000만 마르크를 지불했다. 1956년 연방보상법을 통해 인종ㆍ신앙ㆍ세계관 혹은 정치적 이유나 나치즘에 대한 저항 운동 등의 이유로 박해받은 사람에게 약 679억 마르크를 지불했다.
독일은 특히 1953년 런던채무협정에서 통일 후로 연기됐던 구소련 및 동구 제국의 전쟁피해 검토 문제에 대해서도 통일 직후인 1992년 새로 폴란드와 러시아 등 구동구권 여러 국민이 입은 과거 전쟁피해에 대한 사죄와 보상에 착수했다.
1992년 4월28일 폴란드에 화해기금을 설치하고 여기에 5억 마르크를 제공함으로써 통일독일은 나치 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 과거 독일기업에서 강제노동에 복무한 사람들에 대한 보상에 성의를 보였으며 1993년 1월29일 러시아, 벨로루시, 우크라이나에도 10억마르크를 지불키로 약속했다. 2000년 7월 17일에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피해를 본 외국인들에게 배상하기 위해 미국, 이스라엘, 폴란드, 러시아, 체코, 우크라이나 등과 국제협정을 체결했다. 이는 정부와 민간이 힘을 합쳐 자신들의과거의 잘못을 솔직히 사죄하고, 그 표시로 1백억 마르크라는 엄청난 배상을 감당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일본의 경우 냉전의 격화와 미국의 비호 아래서 제대로 된 배상없이 경제재건에 나서게 됐고 이제까지 이러한 ‘무임승차’가 국제사회의 지적거리로 남아있는 실정이다. 또한 아직까지도 2차 대전 당시 조선인들을 혹사했던 것이다.
# by | 2008/06/18 23:21 | 반일 모드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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