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2월 06일
금석문 / 유물 百済 金石文
百済 벽돌의 도깨비



甲寅年正月九日奈祇城砂宅智積」
慷身日之易往慨體月之難還穿金」
以建珍堂鑿玉以立寶塔巍巍慈容」
吐神光以送雲峩峩悲貇含聖明以」
慷身日之易往慨體月之難還穿金」
以建珍堂鑿玉以立寶塔巍巍慈容」
吐神光以送雲峩峩悲貇含聖明以」
갑인년(甲寅年) 정월 내기성(奈祇城)의 사택지적(砂宅智積)은 해가 쉬이 가는 것을 슬퍼하고 달은 어렵사리 돌아오는 것이 서러워서, 금을 캐어 진귀한 집[珍堂]을 짓고 옷을 파내어 보배로운 탑[寶塔]을 세우니, 그 높디놓은[巍巍]한 자애로운 모습은 신령스런 빛을 토하여 구름을 보내는 듯하고, 그 우뚝 속은[峩峩] 자비로운 모습은 성스로운 밝음을 머금어...
*년대 추정*
일본서기 (卷第)24 황극천황임인년칠월조(皇極天皇壬寅年七月條)에 '향백제사인대좌평지적등어조(饗百濟使人大佐平智積等於朝)'라는 기록을참조하면 백제 의자왕 14년(A.D 654) 건립으로 추정된다.

勿部將軍功德記
백제 패망후 당나라에 끌려간 백제 장군의 묘지석
중국 산시성(山西省) 천룡산석굴(天龍山石窟) 출토품으로, 동해(東海) 출신인 ' 勿部珣' 장군이 그의 부인이자 백제 출신 흑치상지 장군의 둘째딸인 흑치부인이 돌아가신 임금과 친척들을 위해 석굴을 조성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백제 패망후 당나라에 끌려간 백제 장군의 묘지석
중국 산시성(山西省) 천룡산석굴(天龍山石窟) 출토품으로, 동해(東海) 출신인 ' 勿部珣' 장군이 그의 부인이자 백제 출신 흑치상지 장군의 둘째딸인 흑치부인이 돌아가신 임금과 친척들을 위해 석굴을 조성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능산리절터-6세기 백제 사면목간(四面木簡)
小吏猪耳其身者如黑也
*百済語 - 猪耳(tozi) : 돼지
小吏猪耳其身者如黑也
*百済語 - 猪耳(tozi) : 돼지

능산리 나성 羅城 목간
宿世結業 同生一處 是非相問 上拜白事
宿世結業 同生一處 是非相問 上拜白事

궁남지 목간 宮南池 木簡
앞
西? 後巷巳澾巳丁 依活△△△丁 서부 후항(西部 後巷
(당시의 행정단의)의 사달사(巳澾巳)가)
歸人中口四 小口二 邁羅城法利源 水田五形
(귀화인 중구 4명 하구 2명을 이끌고 매라성 법리원(당시의 지명) 논을 개간했다.)
뒤
西? 中△? 夷
(서부중 부이)
앞
西? 後巷巳澾巳丁 依活△△△丁 서부 후항(西部 後巷
(당시의 행정단의)의 사달사(巳澾巳)가)
歸人中口四 小口二 邁羅城法利源 水田五形
(귀화인 중구 4명 하구 2명을 이끌고 매라성 법리원(당시의 지명) 논을 개간했다.)
뒤
西? 中△? 夷
(서부중 부이)

부여 능산리 절터 백제 목간의 보희사(寶憙寺)

无奉義 道緣立立立
-백제 능산리 절터 발굴품-
-백제 능산리 절터 발굴품-


백령산성 기와 栢嶺 山城
上水瓦作五十九 /一夫瓦九十五) / 作(人?)那魯城移文


百済 - 鄭智遠銘一光三尊佛
정지원위망처 조사경조금상 조리삼도
鄭智遠爲亡妻 趙思敬造金像 早離三塗
百濟昌王十三年太歲在
上水瓦作五十九 /一夫瓦九十五) / 作(人?)那魯城移文


百済 - 鄭智遠銘一光三尊佛
정지원위망처 조사경조금상 조리삼도
鄭智遠爲亡妻 趙思敬造金像 早離三塗

丁亥? 兄公主供舍利
백제창왕(昌王;555~598)
王興寺址 昌王銘 沙利器 (557年)
이체자가 쓰인 三(삼), 立(입)·刹(찰)·本(본)·葬(장)·神(신)
2008년 7월 25일 공개된 전남 나주 지역에서 ‘백제의 관영(官營) 제철소 목간’
제철 유적 인근 웅덩이 시설 내부에서 수습된 목간들은 모두 한쪽 면에만 붓글씨가 쓰여진 것으로 나타났다.
윗 부분 일부가 잘려 나간 첫 번째 목간은 잔존 길이 8.4㎝, 너비 4.1㎝, 두께 0.5-0.6㎝에 ‘…(年)三月中監數長人…出省者(得)捉得□奴…’ 정도로 읽힐 수 있는 16글자의 묵서(墨書)가 2행에 걸쳐 확인됐다.
'兄將○立○○○四二 中○四 ○二 …○○○○○ ○定文丁○○一女○ ○○○○二巴四入○○○○ 定' 자 정도만 읽을 수 있다"고 연구소는 말했다. 따라서 "두 목간에 기록된 내용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인력 관리에 대한 문서로 파악된다"면서 "더 구체적인 내용은 차후 관계 전문가들의 의견수렴을 거쳐 별도로 발표하겠다"고 연구소는 덧붙였다.
쌍북리 백제 목간은 最古 '환곡 문서'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재)백제문화재연구원(원장 서오선)이 백제 마지막 수도인 충남 부여 쌍북리에서 발굴한 백제시대 목간(木簡)은 정부가 구황기에 곡물이나 식량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았음을 기록한 이른바 '환곡(還穀) 문서'이며 이런 공문서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공문서를 통해 6-7세기 무렵 백제 조정이 구황기에 곡물(식량)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았다는 사실도 명확히 드러났다. 2008-04-24
백제창왕(昌王;555~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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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 유적 인근 웅덩이 시설 내부에서 수습된 목간들은 모두 한쪽 면에만 붓글씨가 쓰여진 것으로 나타났다.
윗 부분 일부가 잘려 나간 첫 번째 목간은 잔존 길이 8.4㎝, 너비 4.1㎝, 두께 0.5-0.6㎝에 ‘…(年)三月中監數長人…出省者(得)捉得□奴…’ 정도로 읽힐 수 있는 16글자의 묵서(墨書)가 2행에 걸쳐 확인됐다.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재)백제문화재연구원(원장 서오선)이 백제 마지막 수도인 충남 부여 쌍북리에서 발굴한 백제시대 목간(木簡)은 정부가 구황기에 곡물이나 식량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았음을 기록한 이른바 '환곡(還穀) 문서'이며 이런 공문서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공문서를 통해 6-7세기 무렵 백제 조정이 구황기에 곡물(식량)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았다는 사실도 명확히 드러났다. 2008-04-24
# by | 2008/02/06 00:22 | korea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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