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4월 27일
조선통신사 일본 여행기 (승사록)
원중거(元重擧 1719~1790)이 쓴 <승사록>
< 굶주린 일본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조선통신사>
10월 17일 경자
동북풍이 밤에 크게 불어 그로 인해 대포(大浦)에 머물렀다.
..........(일본)백성들이 고생스럽고 인색한 것은 아마 천하에서 최고일 것으로 비록 우리 배를 끄는 격졸(格卒)로 말한다 하더라도 매일매일 익힌 고구마 뿌리를 두 번 먹고 그 뒤에 밥을 먹는 사람은 오분의 일에 불과하다.또한 수저질 몇번에 나무 그릇 바닥에 닿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비록 같이 앉아서 먹는 사람이 (밥이)없다고 해도 양식 한 톨도 나누어 주지 않는다.
(우리)여섯 배에 타고 있는 왜의 사공들은 예에 따라 우리가 음식을 먹이는데, 모두 큰 통을 가지고 와서 반드시 음식을 많이 달라고 한다.(우리)격군들이 그들의 음식을 탐하는 것을 비웃으며 질책을 하여도 또한 부끄러움을 알 지 못하였다. 백성들은 날로 번창하는데(숫자는 많아지는데)살아가는 형편이 이와 같이 심하게 고통스러우니, 만일 그들의 배를 만드는 능력이 우리의 열배가 된다면 우리 앞날에 닥칠 근심이 또한 적지 않으리라 저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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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용으로 잘 꾸며진 조선통신사의 길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나오는 일본의 진짜 모습>
12월 21일 계묘
마을은 가히 백 호쯤 되는데 모두 초가집이었고 사는 것이 궁핍했으며 모두 남루했고 빗질도 안 했으며 씻지도 않았다. 여자들은 나오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으니 의복이 깨끗하지 않아 다른 사람을 만날까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라고 한다.널로 덮은 3층짜리 집들이 있었는데 모두 신사(神舍)와 승사(僧舍)라고 한다.
2월 9일 신묘
맑음. 해가 뜰 때 출발하여 40리를 가서 금곡령(金谷嶺)에서 점심을 먹었고 30리를 가서 등지(藤枝)에서 묵었다. 이날은 70리를 갔다.
..동북으로 이십여 리를 가서 금곡령에 올랐다
...
안과 밖 두 고개에 있는 인가들은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모두 차와 떡을 팔고 있었다. 긱 집들을 지날 때마다 법번히 분칠하고 연지를 바른 여인들이 왼쪽에는 떡을 들고 오른쪽에는 당고(糖膏)를 들고 앞에서 사람을 맞이하면서 괴롭도록 말을 간절히 하였다. 집집마다 경쟁하는 소리가 서로 들렸다. 여자는 창(娼 창.녀)라고 한다. 다만 그 이는 모두 물들였다.
마을은 좁고 누추하였으나 관소는 빼어났다.(화려했다) 각각의 처소들도 또한 많이 그러하였다. 대개 모두 각 주(州) 태수(太守)가 왕래할 때 쉬는 곳이라고 한다.

<급기야는 에도의 입구에서 거지떼를 만나다>
2월 15일 정유
흐리고 저물녘에 비가 왔다. 아침에 떠나 45리를 가서 신내천(神奈川)에서 점심을 먹었고 또 45리를 가서 품천(品川)에서 묵었다.
...신내천 이후는 무장주에 속한다. 대개 등지(藤枝) 동쪽의 땅은 더럽고 무너진 것이 많았으며 더욱 앞을 못 보면서 구걸하는 사람과 앉은뱅이와 절뚝발이와 곱사등이가 많이 어지럽게 뒤섞여 구걸을 했으니 이는 강호(江戶 에도)에서 구걸하는 무리들이 여기로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토품(土品)도 또한 박하였다(형편 없었다)
< 비참하게 가난한....일본 어부>
5월 19일
고공사 아래에 머물렀을 때 작은 배에 나무 손잡이가 있는 둥근 어망을 실은 어부가 그 아내와 더불어 배를 저어 오징어를 잡고 있었다.
어부는 한 자쯤 되는 베로 음부를 가리었고 그의 아내도 한 자쯤 되는 베로 치마폭을 만들어 앞뒤를 가리었으니, 남녀가 온몸을 벌겋게 내놓고 있었다.
아들은 나이가 열두서너 살 가량 되었고한 한 아이는 젖을 먹고 있었다.돛대에다가 오징어 수십마리를 꿰어 걸어 말리고 있었으며 작은 솥과 나무 그릇도 있었으니 아침 저녁으로 음식을 해먹기 위함 이었다

그 (일본)문사(文士)들은 한번 우리 자리에 들어오면 참으로 하늘에 올라 용(龍)이 된 듯한 기쁨을 가졌고, 혹시 말 한 마디라도 서로 하게 되면 문득 기뻐하는 빛을 얼굴에 나타냈으며 곁에 있는 사람도 이를 무척 기뻐하였다.
비록 시를 가지고 오기는 해도 본래 자랑하거나 재주를 겨루겠다는 뜻은 없었다. 이것이 아니면 능히 손을 빌려 서로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우리나라 사람의 시나 글씨를 구하는 데 잘되고 못된 것을 논하지 않았고, 얻음이 있으면 기뻐하였으며 한번 창수(唱酬 시나 문장을 주고받음)하는데 참여하면 문득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는 선비가 되고, 혹시 한 마디 칭찬이라도 얻으면 그 평판이나 가치가 여러 세대를 두루 전하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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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로 일본에는 거지들만 득시글 거리고 있었군. 神奈川, 品川.. 모두 비루한 동네였구나 w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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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중한 것은, 시대위서민(가난한 사람이 다수다)은 열심히 살아 왔다고 하는 것이야.그것은, 일본도 한국도 같아.지배자 계급은 일본도 한국도 부자야. 같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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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왜 댁들은 그렇게 에도를 자랑하면서 남대문과 비교하는것인지? 그동안 제시했던 에도의 사진은 선전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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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낙원이란, 사실은 오사카의 일이었다」 「북경을 본 통역이 통신사에 있지만, 「북경의 번영도 오사카에는 진다」라고 한다 」 「이 풍부한 낙원을 일본인이 소유하고 있다.분하다」 「조선의 수도도 훌륭하지만, 나고야와 비교하면, 매우 외롭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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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도를 보고 「누각이나 저택의 사치스러움, , 사람들의 활기차, 남녀의 화려함, 성벽의 아름다움, 다리나 배….모두가 오사카나 쿄토에서 삼배는 우수하다.이 훌륭함을 문장으로 표현하는 일은, 나의 재능에서는 불가능하다」······1761년에 일본 방문한 조선 통신사, 김 히토시겸(Kim In Kyeom)의 저서 「닛토장유가」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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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인이 자랑하는 에도시대 번영의 진실====>일반 평민을 가혹하게 착취하는 소수의 지배층 일본인이 자랑하는 에도시대 번영의 진실====>일반 평민을 가혹하게 착취하는 소수의 지배층 반면 당시 조선은 임금을 제외하고는 99칸 이상의 집을 지을 수가 없었고 여자들의 장신구 까지 엄격하게 사치를 금했다.(법으로 금지) 이런 조선에서 자란 조선통신사 일행은 ...그래서 일본을 보고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시골의 농민들은 1년 내내 경작하여도 다 관아로 들어가고 풍년이 들어도 콩 반쪽도 잇기 어려워 스스로 처자를 팔아먹기까지 하니 ....빈부가 균등치 않음이 다 국법의 폐단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빈부가 균등치 않음이 다 국법의 폐단에서 말미암은 것이다."<신유한 [申維翰, 168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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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 w 약소 국가에서 멸망의 위기가 되는 국가 운영이 자랑입니까 w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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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20./ 은 어제 0020이 한 엉터리 발제(發題)나 제대로 마무리 지으시기 바랍니다....대충 퍼질러 놓고 화제 돌리는 0020..wwwww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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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도시대의 일본은, 정말로 민도가 높고, 서민 문화도 많이 태어났군요.^^당시 , 세계 최고의 도시였을 것이다.그것도 에도 이전의 일본의 선조의 실력의 계속이다.현재의 일본도 같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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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여섯 배에 타고 있는 왜의 사공들은 예에 따라 우리가 음식을 먹이는데, 모두 큰 통을 가지고 와서 반드시 음식을 많이 달라고 한다.(우리)격군들이 그들의 음식을 탐하는 것을 비웃으며 질책을 하여도 또한 부끄러움을 알 지 못하였다 |
# by | 2008/04/27 20:30 | 조선시대 朝鮮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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