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세종대왕 왕인의 난파진가(難波津歌) 발표.

오늘날 일본이 자랑하고 있는 와카(和歌)의 시작은 알고보면 왕인이 지은 노래인 '난파진가(難波津歌)'다
와카(和歌)의 출현은 일본어 표기법이 한문에서 이두형식으로 바뀐 
왜국역사상 가장 큰 사건으로 이때부터 백제인은 일본어를 기록할수 있었다.
 혐한 원숭이들이 왜 그렇게 왕인박사를 모독하면서도 츤데레를 발산하는지 이해하자.

왕인박사 ,와니키시(악어왕). 和邇吉師(わにきし) ,照古主
 
일본서기보다 먼저쓰인 고사기를 보면 초고(照古), 화이길사(키시: 백제어 건길지/큰키시: 큰왕)로
백제 초고왕(소고왕)의 이름이 일본서기의 왕인박사의 행적과 동일하게 나온다.
왕인은 고사기를 보면서 일본서기 작가가 초고왕을 모델로 창작한 인물이기 때문에 당연히 삼국사기엔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왜인들이 주장하는 왕인은 삼국사기에 안나오므로 날조인물 데쓰!는 완전히 논파되는 것이다.
일본서기는 애초부터 백제왕가를 다 날조시켜 둔갑시킨 역사서라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한국인이면 다 알수있다.

왕인이 일본에 학문을 가르치고 여러 토대를 세웠다는것은 백제 초고왕이 열도를 지배했다는 뜻과도 같다.
그럼 왕인 할아버지가 왜 천황(아이)에게 학문을 가르치는가? 당연히 임나왕(천황)은 백제 왕손들이므로 왜왕이기 때문이다

초고왕(와니키시)는 고사기에 와니(악어)로도 나온다. 와니는 고사기 이나바 토끼 신화에서 열도로 반도로 도망가
헤엄치려는 토끼(우사기=신라 천일창,대가야 왕자)를 괴롭혀 토끼의 생가죽을 벗기는 악당 캐릭터다.
 和邇라는 단어는 삼한시대 대마도에서 열도로 출발하던 항구 지명으로 임나가 옛 대마도였음을 알수있다.
신라왕자 천일창의 후손에 불과한 신공황후가 신라를 칠때 화이진(와니진)을 출발하는 장면에도 나온다.
 
초고왕의 담로왕(왕세자)들이 파견된 대마도는 임나의 하나로 백제가 관리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즈모 일대를 다스리던 신라의 식민지 천일창 왕가를 토벌한 싸움을 상징적으로 구성한 설화였기 때문이다.
임나는 열도와 한반도 남부의 백제식민지를 통틀어 부르던 단어이며 나니와에 있는 임나를 일본이라 불렀다.
나니와의 임나(일본)가 왜국(신라-가야 왕가)를 정벌한것을 교묘히 계보를 바꾼것이 일본서기다.
그래서 일본서기는 왜국의 역사책인데 이상하게 타국(백제)의 왕가의 재위와 사망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어린시절은 왜왕이므로 천황이고.. 커서는 무령왕처럼 본국으로 갔던 왕들도 있기 때문에 기록을 안할수가 없었다.

난파 나루터의 노래 (난파진가·難波津歌) - 왕인 박사(악어왕)

奈迩波ツ尓 佐久夜己能 波奈布由 己母理伊麻 波波流倍等 佐久夜己乃波奈
나니와쓰니 사구야고노 하나후유 고모리이마  하~루베도 사구야고노 하나(일본식 해석)

'나니와쓰에 피는구나 이 꽃은 겨울 잠자고 지금이 봄이라고 피는구나 이 꽃은(일본식 해석) 

※위의 한자들은 훗날 부수들이 생략되어 이렇게 바뀐다.

なにはつにさくやこのはなふゆこもりいまははるべとさくやこのはな

와카의 기원에 대해서는 고등학교 고문으로 배우는 "신고 킨와 카슈 가명 서"가 유명하다.
作者の紀貫之は「難波(なにわ)津(づ)の歌」と「安積(あさか)山(やま)の歌」を「うたのちちはは」だという。
저자 紀貫之는 "나니와즈의 노래"와 "아사카 산의 노래"를 "노래 후 여덟은은"이라고 한다.

「難波津に 咲くやこの花 冬ごもり 今は春べと 咲くやこの花」--仁徳天皇が、かつて弟と東宮位を譲りあった時に、王仁(わに)がこの歌を献じて即位を勧めたとされる。
"나니와즈에 피는 꽃 겨울 지나고 지금은 봄이라고 피는 꽃"-
 닌토쿠 천황이 한때 동생과 동궁위를 양보할 때 왕인(와니키시)이 이 노래를 지어 진정으로 즉위 초대한다.

さて、王仁は百済の人である。
그런데, 왕인은 백제 사람이다.

漢字を伝えるために論語や千字文をたずさえて渡来した。
한자를 전하기 위해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도래했다.

百済から来て、いきなりやまと歌の父になれるか。
백제에서 오자마자 야마토 노래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는가?.



죽간으로 발견되는 실제의 난파진가(難波津歌)
당시에는 혁명적인 일본어 표기법으로 귀족들이 난파진가를 읊으며 암송하던 죽간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

일본에서도 최초향가인 난파진가는 그 가치가 대단하여 후대 필사본조차도 국보로 대접받고 있었는데
왕인박사의 원문 난파진가 목간이 발견되자 열도에 난리가 났었다.

신문들은 난해한 난파진가 죽간의 원문과 후대의 필사본들을 대조하며 들떠있었다.
죽간덕분에 후대의 고금가화집 필사본이 뻥이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후대에 난파진가는 ‘히라가나’로 옴겨져 이런 문헌들이 일본 각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12세기 후지와라노 사타이에가 붓글씨로 쓴 ‘난파진가’.(‘고금가화집(古今和歌集)’의 필사본·일본국보)



와카, 히라카나, 한글로 쓰여진 난파진가(難波津歌)기념비
오사카 이쿠노구(生野區)의 미유키모리(御幸森) 신사 (2009.11월 세움)


밑의 발언들은 혐한들 괴롭히는 낚시집 ㅋ

기노 쓰라유키 (紀貫之·平安時代 고금가화집(古今和歌集)의 저자)
“‘난파진가’는 아버지의 노래(父歌)이며, 천황 어대에 최초로 읊은 노래”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1882∼1944 일제시대 경성제대 조선어학과 교수)
“한자어를 일본어에 맞춰 써 온 ‘만요가나’는 조선의 이두의 영향을 받았다”(鄕歌及び‘吏讀の硏究’ 1929)


모리 히로미치(森博達· 교토산대 교수)
“고대 일본어는 본래 ‘구다라어’(百濟語)였다. 그 후 중국 ‘오어’(吳語)의 영향으로 일본 고대어인 백제어에 차츰 탁음(濁音)이 붙게 되었다” ‘고한음과 왜음’(古韓音と倭音) 항목에서 “오음(吳音)보다도 고색(古色)을 띠는 한자음은 한국 옛한자음이다. 한국의 옛한자음을 바탕으로 쓴 일본 가나 글자에는 사이타마 이나리야마고분(埼玉稻荷山古墳)에서 출토된 철검에 새겨진 ‘가나’이며, 스이코 여왕(592∼628) 당시 유문(遺文)의 ‘가나’,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 사료의 ‘가나’ 등이 있다”(‘日本書紀の謎を解く’ 中央公論社, 1999)


와카 모리타로(和歌森太郞· 도쿄교대 사학과 교수)
“북규슈 구마모도의 후나야마고분(船山古墳)에서 발굴된 칼은 백제 개로왕(455∼475 재위) 때 백제인 기술자 이태가(伊太加)가 만들었고, “장안(張安)이 글씨를 써서 음각한 것으로 외래인이 한자를 구사했다는 증거이다”(‘日本史の虛像と實像’ 每日新聞社, 1972)


나오키 고지로(直木孝次郞·1919∼ 오사카시립대 사학과 교수)
“후나야마고분 출토 유물을 살필 때 일본 야마토 정권(4C∼7C 중엽)은 신라인지 백제인지 확정할 수 없으나 남한에 종속돼 있었다고 본다”(‘日本神話と古代國家’ 1993)



다케다 유키치(武田祐吉, 1886∼1958 교수)
“한자를 음부(音符) 문자로 취급한 것으로서 일본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은 스이코 여왕 때 세운 이요온천비(伊豫溫泉碑)로 한국인 혜총(惠聰)이 만든 것으로 본다. 지명을 표현하는 이요(夷與·いよ)라는 두 가지 표현의 글자는 한자로 일본어를 묘사한 것으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上代日本文學史’ 博文館, 1936)



우지타니 쓰토무(宇治谷孟, 滋賀文敎大 교수)
“‘일본서기’를 고대 조선어로 읽음으로써 종래 일본인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기발한 해석 방법을 알게 되었다. ‘만요가나’의 한자어 사용에는 갑류, 을류라고 하는 2종류가 있고, 그 당시 역사를 쓴 사람들의 출신지 사투리의 차이, 즉 백제계와 신라계라는 두 가지 계통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에 이르렀다”(‘日本書紀’講談社, 1988)





나카다 노리오(도쿄교육대학 국어과 교수)
백제인 왕실은 ‘히라가나’는 여자들이나 쓰는 글자라고 비하했다”(‘平安時代の國語’ 1969)




아키히토 (일본천황)
“제50대 칸무천황의 생모는 백제 무령왕의 후손으로 나 자신도 한국에 인연을 느낀다” (2002 월드컵)
“사실 나의 조상도 한국인입니다” (전두환 초청 만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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