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 비석 신묘년 해석 ( 広開土王碑 )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백잔신라 구시속민 유래조공
백잔과 신라는 옛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으므로 조공해 왔다.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
이왜이신묘년래 도해파백잔
그런데 신묘년(391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왔다. (고구려는) 백잔을 무너뜨리고..

☐☐☐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라 이위신민 이육년병신 왕궁솔수군 토벌잔국

?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대왕은 6년 병신년(AD396)되는 해에 수군을 이끌고 잔국을 토벌했다.




以의 해석법 .
신묘년 以來(이래로)라고 쓰인 부분은 없다고 밝혀진지 오래다.
주로 원숭이들이 이래로~라고 해석하는데 후대 사건(5세기 이후)을 억지로 연관시키려는 수작이다.
원문 倭以辛卯年來  여기서 以는 접속사로 '~에' 뜻을  지닌다. 따라서 391년에만 벌어진 사건이다.


391년에 뭔 일이 있었길래?

해석 삽질하지 말고 한일 두나라의 사서에 뭐라고 쓰였는지 보면 답이 나온다.
삼국사기는 실제 금석문의 년도보다 1년 빠른 오차가 있다. (ex 무령왕릉 지석, 광개토대왕 비석)
두말하면 입 아프지만 삼국사기에서는 392년 사건들이 비석의 신묘년(391년)이 된다.
1년 오차를 보정해 백제본기의 기록을 보면 진사왕 8년이 392년이므로 이때가 비석의 신묘년 즉 실제 391년의 사건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391년 진사왕
八年, 夏五月丁卯朔, 日有食之. 秋七月, <高句麗>王<談德>, 帥兵四萬, 來攻北鄙, 陷<石峴>等十餘城. 王聞<談德>能用兵, 不得出拒, <漢水>北諸部落, 多沒焉. 冬十月, <高句麗>攻拔<關彌城>. 王田於<狗原>, 經旬不返. 十一月, 薨於<狗原>行宮。

8년 여름 5월 초하루 정묘일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 고구려왕 담덕이 4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변경을 침공하여 석현성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용병에 능통하다는 말을 듣고 대항하기를 회피하였다. 한수 북쪽의 여러 부락을 빼앗겼다.
겨울 10월, 고구려가 관미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왕이 구원에서 사냥하며 열흘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11월, 왕이 구원의 행궁에서 사망하였다.

일본 서기
11월 백제 진사왕을 왕으로 세운것은 귀국(貴國)의 천황에게 실례가 되었다. 따라서 기각숙이, 우전시대숙이, 석천숙이, 목토숙이를 보내 그 무례함을 꾸짖었다. 이리하여 백제국은 진사왕을 죽여 사죄했다.기각숙이는 아화(阿花)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渡海 글자의 논란.

솔직히 내용에는 별로 상관없지만 ,, 삼수변(水)이 글의 칸을 벗어나고 있으며 貢(바칠 공)의 글자를 변형시킨 느낌도 든다. 호태왕 비석에는 여러개의 海 글자가 나오기때문에 비교작업이 되어 논란에 쌓여있다.
앞에서 조공을 해왔다.. 여기서 조공을 안했다라는 문장이 나오면 매우 자연스러운 문장이 된기는 한다.  아무튼 이부분은 패스.
직역하면 진사왕과 왜국간의 어떤 문제가 발생해 왜인이 도해했다고 생각할수 있다.


破百殘의 주어는 고구려가 맞다.
한일 두나라의 역사기록으로 볼때 삼국사기가 완벽히 일치하는 기록을 보여주며  391년에 고구려의 대규모 침공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서기에는 백제와 전쟁하는 내용은 없고 백제인이 스스로 진사왕을 죽였다는 이상한 이야기가 쓰여있다. 
破百殘하는 주체는 고구려로 나타나며 이로인해 진사왕이 폐위된 기록이 있었음을 짐작할수 있는데 백제본기에선 사냥하다가 실종 변사체로 발견, 일본서기에선 지들이 백제왕을 폐위시킨 것처럼 날조하고 있다.

두 책의 내용과 비석의 흐름으로 볼때 진사왕의 죽음은 고구려에  패전한 백제 진사왕을 폐위시킨것은 고구려일 확률이 높다.


391년에 백제 침공 기록이 없는 원숭이는 shut up!
이미 삼국사기로 끝나는 이야기다. 백제본기에 비문 그대로 391년 고구려의 대규모 침공이 나온다.
백제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주장하고 싶으면 391년의 어떤 사건이라도 좋으니까 자료를 제시하면 좋다. 


臣民의 해석
전쟁에 승리한 고구려인에 의한 간접통치가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봐야한다.
진사왕을 폐위시키고 아신왕을 옹립한것은 고구려인에 의한 것이다.


비문에 빠진 글자는 신라
백제와 신라는 4세기 말부터 고구려의 간접 통치를 받는다. 


396년 고구려의 본격적인 백제 토벌. 토벌잔국
무서운 내용이다. 고구려가 얼마나 잔혹한 나라인지 충분히 알수있다.
고구려는 신라엔 관대하지만 백제와 왜구는 무자비하게 쓸었던 기록이 호태왕 비석 곳곳에 남아있다. 
백제는 이때 서울의 위례성이 무너져 멸망 위기였지만 충청도 금강 유역으로 천도해 제2의 백제 시대를 연다.



그밖에 열도 회칠 탁본의 수많은 오류

  •  왜만왜괴(x) , 왜구대궤(o)
    회칠 탁본(윤곽을 붓으로 그리고 여백을 색칠)의 문제점으로 판독이 어려운 글자를 망상으로 판독하는 경우가 많다.
    정밀탁본에서는 왜만왜괴가 왜구대괴로 나타나는데 왜국이 아니라 단순한 왜구 즉 해적설로 보는 학설이 있다.

 



비문의 倭는 단순히 왜구, 해적에 불과하며 , 고구려에게도 이렇게 무시당했다.

  • 토리잔국(x) , 토벌잔국(o)
     김성호의 비류백제 학설 이잔국을 만들어낸 유명한 오판독. 利가 아니라 실제 정밀 탁본에선 伐로 나온다.


왕건군의 발언 "비문은 변조되지 않았다."

확실히 비문변조설은 한물간 학설로 왕건군의 발언을 근거로 발광하는 원숭이들이 있다.
원숭이들이 제작한 회칠 묵서는 글씨를 보고 판독한 내용을 그린것이지 탁본은 아니다.
정밀 탁본을 제작한 왕건군은 비문의 倭를 단순한 왜구(해적)로 보는 학자이다.


원숭이가 신묘년에 집착하는 이유
임나일본부의 근거로 만드려는 이유도 있지만(주로 혐한들), 일본에선 4세기가 기록의 공백기로 일본서기에도 안나오고 중국에 조공도 안한 시절로 왜국에 어떤일이 있었나 전혀 알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때의 왜국 활동기록은 유일하게 호태왕 비석에서만 나타나 추정할수 있기 때문에 신묘년 기록을 보물단지처럼 생각한다. 
신묘년에 왜군이 한국에 출병하니까 왜국은 통일국가가 이미 완성됬다는 확장 이론이다.





*COPY용*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
百殘☐☐☐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by 카피사루0 | 2008/03/04 20:52 | korea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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